기아가 'EV 시대'를 맞아 새롭게 내놓은 EV9은 대형 SUV 시장에서 전동화 전환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기존 내연기관 중심이던 대형 SUV 시장에서 전기차는 아직 생소한 편이다. EV9을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직접 타본 후, 패밀리카로써의 대형 SUV가 전기차 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살펴봤다.
첫 인상은 압도적이었다. 길이 5010mm, 너비 1980mm의 크기로 도심의 좁은 도로에서조차 위압적인 분위기를 발산한다. 확실히 전기 승용차로서는 큰 덩치다. 기존 대형 SUV 특유의 강렬한 느낌과 미래 지향적인 전기차 이미지를 적절히 조화시킨 디자인이다. 전면부는 디지털 그래픽이 살아있는 헤드램프와 직선적인 라인이 조화를 이루며 단단하고 미래 지향적인 인상을 줬다. 그래픽은 픽셀 형태로 차주의 의도에 따라 다양해진다. 이 기능은 구독으로 이어질거라는 게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지금 보기에는 상당히 만족감이 있다.
실내에 들어서자 실용적이고 세련된 구성이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12.3인치 디스플레이가 이어진 파노라믹 디지털 콕핏은 시인성이 뛰어나고 작동도 직관적이다. 센터 콘솔은 물리적 버튼을 최소화한 대신 터치스크린과 터치패널로 대부분 조작이 가능해 깔끔하고 편리하다. 디지털 사이드 미러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하다.
시승한 EV9은 6인승 모델로, 2열 시트는 독립식이며 넓고 안락한 공간을 제공했다. 아이들과 함께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패밀리카로서도 충분히 적합한 모습이다. 2열 시트는 앞뒤 조정 및 각도 조절이 자유로워 승객들이 피로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다. 마사지 기능도 플러스다. 3열 역시 성인 탑승자가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시트 폴딩을 통해 짐 공간을 최대화할 수 있어 캠핑이나 야외 활동 등 가족 단위 이용에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주행 중 경험한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도 만족스러웠다. 고속도로에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차로 유지 보조 기능을 활용했다. 제법 차선 중앙을 정확히 유지하며 안정적이다. 보통 대형차는 차폭이 넓어 차선이탈에 대한 알림만 제공하는 편인데, EV9은 차선유지까지 지원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시스템의 개입은 스티어링휠 진동으로 알려준다. 스티어링휠 운전자 감지는 터치식이다.
EV9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부드러우면서도 안정적인 주행 질감이다. 시내 도로에서는 전기차 특유의 매끄러운 가속과 감속 덕분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정숙성은 대형 내연기관 SUV와 비교해 확실히 뛰어나다. 노면 소음이나 외부 소음 차단이 잘 되어 실내는 고급 세단 수준의 정숙성을 유지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 속도를 높여도 안정감은 그대로다. 배터리가 차체 하부에 장착돼 무게 중심이 낮아 코너링이나 급가속, 급제동 시에도 차량의 흔들림이 적다. 대형 SUV임에도 불구하고 핸들링은 가벼우면서도 민첩하게 반응해 운전이 즐거웠다.
EV9은 대형 전기 SUV답게 99.8kWh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덕분에 완충 시 공식적으로 480km 이상 주행이 가능하다. 실제 서울에서 출발해 인천 대부도까지 왕복하며 테스트한 결과 약 300km 주행 후에도 배터리 잔량은 40% 이상 남아있었다. 주행 습관과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서울-부산 같은 장거리 주행도 부담 없이 가능한 수준이다.
EV9은 800V 초고속 충전 시스템을 갖춰 고속 충전소에서는 20분 이내에 10%에서 80%까지 충전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가격은 6400만원부터 시작해 8000만원까지다. 덩치도 그렇고 수입차와 비교하면 역시 이정도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