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시승기는 마력과 토크, 혹은 제로백이라는 숫자에 매몰되곤 한다. 하지만 지프 그랜드 체로키 L의 운전석에 앉는 순간, 그런 기계적인 수치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특히, 구성원이 많은 가족의 가장이 운전자라면 더욱 말이다.
이 거대한 흰색 덩치는 자동차라기보다 서울 한복판으로 옮겨온 '움직이는 미국식 펜트하우스'에 가깝다. 투박한 오프로더의 대명사였던 지프가 가죽과 나무, 그리고 첨단 기술을 버무려 만들어낸 공간은 도심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명상실과 같은 고요함을 선사한다.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사실이다.
외관은 정장을 잘 차려입은 럭비 선수를 떠올리게 한다. 감추려야 가려지지 않는 근육질의 몸매를 말한다. 지프 특유의 세븐 슬롯 그릴은 유지하되, 날렵해진 헤드램프와 길게 뻗은 전장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샤크 노즈의 엣지도 분명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특히, 이번 시승차처럼 화이트 바디와 블랙 루프의 대조는 자칫 둔해 보일 수 있는 대형 SUV의 인상을 세련되게 다듬어준다. 주차장의 좁은 칸을 꽉 채우는 덩치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천박하지 않은 위엄이 느껴지는 이유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지프가 가진 선입견은 완전히 무너진다. 손끝에 닿는 모든 곳이 부드러운 가죽과 실제 나무 소재로 마감되어 있다. 동물애호가들의 속물 비평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다. 3열까지 넉넉하게 뻗은 실내 공간은 단순히 사람을 많이 태우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이 차의 진정한 가치는 텅 빈 3열을 그대로 둔 채, 광활한 공간이 주는 심리적 여유를 만끽하는 데 있다. 맥킨토시(McIntosh) 오디오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도심의 교통 체증조차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한 편의 영화 배경음악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주행 질감은 요트를 탄 듯 매끄럽다. 3.6리터 V6 가솔린 엔진은 최근 유행하는 전기차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대배기량 자연흡기 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호흡을 보여준다. 에어 서스펜션은 노면의 자잘한 충격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지워버리며 탑승자를 구름 위로 띄운다. 도심의 방지턱은 이 거구에게 그저 가벼운 노면의 굴곡일 뿐이다.
물론 이 차의 뿌리는 오프로드에 있다. 하지만 그랜드 체로키 L을 타고 진흙탕으로 뛰어드는 것은 턱시도를 입고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대신 이 차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문명의 끝까지 달릴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를 소유하는 만족감을 준다. 답답한 도심의 그리드 안에서 이 거대한 존재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전자는 이미 일상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자유를 경험하게 될 거 같다.
그랜드 체로키 L은 효율성을 따지는 합리주의자를 위한 차가 아니다. 공간이 주는 사치를 이해하고, 남들의 시선보다 나 자신의 안락함을 우선시하는 이들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