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와 랜드로버는 모두 전후(戰後) 시대에 태어난 4×4의 원조지만, 그 탄생 배경과 발전 과정이 판이하게 달랐다. 지프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경량 정찰차량으로 시작되어 “어디든 갈 수 있다(Go Anywhere)”는 실용주의적 자유를 상징했다.
반면 랜드로버는 전후 영국의 농장과 귀족 문화를 배경으로 태어났다. 로버社의 모리스 윌크스와 스펜서 윌크스 형제는 전쟁 중 사용했던 미국의 윌리스 지프에 영감을 받아 1947년부터 자국 상황에 맞는 다목적 차량을 개발했다. 이후 1948년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잉여 전투기 알루미늄을 써서 만든 시리즈 I를 선보이며 오프로드 성능을 강조했다.
이렇게 지프가 ‘전장의 영웅’으로 탄생했다면, 랜드로버는 ‘농장과 정원의 신사’로 싹을 틔운 셈이다.
지프: 자유는 버튼이 아니라 ‘흠집’으로 완성된다
전장의 열기 속에서 탄생한 지프는 튼튼한 차체와 간결한 구조로 악조건을 헤쳐나갔다. 1940년 미국 육군의 요청으로 바턴(Car Company) 설계 기반의 경량 4×4 차 제작에 착수한 윌리스-오버랜드社는 1945년까지 약 36만 대의 군용 지프를 양산하며 그 내구성과 다용성을 증명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회사는 CJ-2A(1945년) 등 민간용 지프를 내놓아 농장과 야외에서도 군용 차량의 실용성을 이어갔다. 지프의 광고 슬로건 ‘어디든 간다, 무엇이든 한다(Go Anywhere, Do Anything)’처럼, 전투에 단련된 지프는 실전에서 검증된 ‘자유와 모험’의 아이콘이 됐다.
1946년에는 철강 차체의 ‘Willys Whyte 윌리스 왜건’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인기가 좋아 당대 최초의 SUV로 불리며 30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실용 모델로 자리잡았다.
1953년 카이저社가 윌리스-오버랜드를 인수해 ‘Willys’ 명칭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AMC(아메리칸 모터스)가 카이저-지프를 인수하며 미국 오프로드 차량의 계보를 이어받았다.
이후 1987년 크라이슬러가 MC를 인수해 지프 브랜드를 가져갔다. 이처럼 지프는 전시(戰時) 기술과 군용 유산을 그대로 민간에 이식한 결과, ‘흠집 하나하나가 이야기’가 되는 거친 매력을 강조해 왔다. 지프 오너들 사이에서 “스크래치가 생겨야 내 차”라는 농담이 전해지는 것도, 이렇듯 성취감과 직접 체험을 중시하는 브랜드 정신의 일면이다.
랜드로버는 지프의 대체물이자 영국만의 색채가 가미된 ‘고급 지프’로 출발했다. 1947년 모리스·스펜서 윌크스 형제가 농장에서 윌리스 지프를 시승하며 부품 조달의 어려움을 걱정한 것이 시작이었다. 두 형제는 “윌리스 지프만큼 튼튼하되, 영국 실정에 맞게 만들자”고 결심하고, 휴가 중에 개념 스케치부터 완성했다. 1948년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공개된 첫 시리즈 I는 전투기 알루미늄 판넬과 ‘바디 온 프레임(샤시 차대)’ 구조를 채택해 몸통이 뒤틀리지 않도록 차대를 강화하는 혁신적인 설계를 선보였다. 쉽게 말하면 차체를 뼈대에 올린 게 아니라 차체 자체가 뼈대라는 말이다. 이름 역시 마법처럼 나왔다. 당시 스코틀랜드 이슬레이 섬에서 시험주행하던 중 “이 차가 진짜 랜드로버(대지를 정복하는 차)이군”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며 브랜드명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후 1970년 첫 1세대 레인지로버가 출시된다. 시리즈 랜드로버의 거친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안락한 실내를 갖춰, 당시로선 ‘SUV = 높은 생활수준’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1989년에는 디스커버리 모델이 론칭된다. 전통적인 랜드로버의 오프로드 성능에 패밀리카 성격과 럭셔리를 더해 광범위한 고객층을 공략했다.
2008년 이후부터는 인도 타타社가 인수하며 재규어-랜드로버(JLR) 체제로 편입된다. 이보크(Evoque)·벨라(Velar) 같은 최신 모델과 함께 고요한 편안함이 강조되는 현대적 SUV로 진화했다.
랜드로버는 유려한 디자인과 온화한 주행감각으로 “험지를 지나도 격조(格調)를 잃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실제로 디스커버리 시리즈는 영국 왕실 행사와 승마대회에서 통근용으로 애용되는 등 명품 SUV로 인정받았다. 이런 배경 탓에 1980년대 중반 런던 부촌에선 랜드로버가 흔히 보였고, 일명 ‘첼시 트랙터(Chelsea tractor)’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지프는 제2차대전의 실용성·개척정신을 담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강렬한 모험 이미지를 강조했다. 반면 랜드로버는 흙길 위에서도 우아함과 품위를 유지하는 ‘세련된 야생’을 강조한다. 런던 고급 주거가에서 인기이며, 로열 패밀리까지 선택한 배경에는 고요함과 권위를 파는 전략이 있다.
지프는 견고한 차체와 직접적인 조향감을 중시해 운전자가 험로를 개척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반면 랜드로버는 2000년대 중반부터 디스커버리 3에 도입된 ‘터레인 리스폰스(Terrain Response)’ 같은 전자제어 기술로 험로 주행을 쉽게 만든다.
즉, 지프가 기계적 신뢰감을 강조하는 반면, 랜드로버는 최신 기술로 안락한 주행 환경을 조성해 고급감을 더한다는 것이다.
[브랜드열전] 오프로더의 두 얼굴, 지프와 랜드로버가 만든 SUV의 철학
이미지 확대보기2023년 엘리자베스 여왕 추모 기념 굿우드 페스티벌 퍼레이드 (시계방향) 출발선에 선 초기 시리즈 모델들, 레인지로버들 사진=랜드로버
당신이 원하는 건 ‘모험’인가, ‘권위’인가
지프는 “흙탕길이든 바위길이든 내가 간다”고 당당히 외치고, 랜드로버는 “어디서든 우아하게”라는 태도로 속삭인다. 어느 쪽이 더 좋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두 브랜드는 각기 다른 왕국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만약 자동차에서 흙 묻은 생생한 이야기를 찾는다면 지프가 맞고, 이동 그 자체가 품위 있는 공간이길 바란다면 랜드로버가 제격이다. SUV 세계의 재미있는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 있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려도, 지프는 ‘자유’를, 랜드로버는 ‘격(格)’을 얻는다는 것. 어쩌면 사람들은 목적지보다 차가 준 이야기를 타고 떠나는지도 모른다. 지프와 랜드로버는 바로 그 욕망을 가장 노골적이고 매력적으로 담아온 두 제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