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기대를 모았던 폭스바겐의 전기 미니밴 ‘ID. 버즈(ID. Buzz)’가 미국 시장에서 차기 모델 생산 중단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이 소식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국내 역시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어서다.
폭스바겐은 2026년형 ID. 버즈의 미국 내 생산 및 출시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최근 북미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와 급변하는 정책 환경에 따른 전략적 후퇴로 풀이된다.
폭스바겐 ID. 버즈는 2017년 처음 디자인이 공개된 이후 전 세계 자동차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2001년 마이크로버스 콘셉트부터 2011년 불리(Bulli), 2016년 버디(Budd-e) 등 수십 년간 이어진 폭스바겐의 레트로 버스 부활 프로젝트는 마침내 2025년형 모델로 결실을 맺었으나, 2024년 말 미국 판매가 시작된 이후 실제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가격 대비 낮은 성능이다. 미국 내 판매 가격은 기본 모델이 6만 1545달러(한화 약 9080만 원)부터 시작하며,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사륜구동과 투톤 외장 옵션을 더하면 7만 달러(한화 약 1억 325만 원)를 훌쩍 넘어선다. 반면 주행거리는 1회 충전 시 약 370~380km(231~234마일) 수준에 불과해 높은 가격대에 걸맞은 효율성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적·제도적 변화 역시 악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 생산되어 수입되는 ID. 버즈는 트럼프 행정부 재집권 이후 부과된 수입 관세의 영향권에 들었으며, 지난 9월 전기차 세액 공제 혜택마저 폐지되면서 가격 경쟁력을 상실했다. 여기에 리콜 조치와 판매 중단 명령까지 겹치며 판매량은 올해 3분기까지 5000대 미만에 머물렀다.
폭스바겐은 이번 조치가 모델의 완전한 단종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폭스바겐 관계자는 ID. 버즈가 브랜드의 상징적인 제품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며, 현재 보유한 2025년형 재고 물량 판매에 집중하면서 2027년형 모델로의 전환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북미 시장의 전기차 한파는 폭스바겐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포드 F-150 라이트닝, 아큐라 ZDX, 닛산 아리아 등 주요 브랜드의 전기차 모델들이 잇따라 생산 중단이나 출시 취소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완성차 업체들이 과도한 보조금 경쟁보다는 하이브리드나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로 눈을 돌리며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북미에서 시작된 전기차 수요 정체 현상은 한국 시장에서도 신차 출시 연기와 전략 수정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GM 한국사업장이 이쿼녹스 EV 도입을 무기한 연기하고 르노코리아가 하이브리드 모델에 집중하는 가운데, 현대차그룹 역시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18종으로 대폭 확대하고 2027년부터는 엔진으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를 도입해 캐즘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고가 대형 전기차 대신 EV3나 캐스퍼 일렉트릭 같은 실속형 소형 모델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완성차 업체의 생산 조절로 인해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공급 계약이 수정되는 등 산업 생태계 전반에 걸친 내실 다지기가 본격화되는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