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대한민국 도로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극적인 대비를 이룰 전망이다. 도로의 한 개 차선을 가득 채우며 위압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전장 5.7미터의 거대한 전기 SUV 옆으로, 좁은 골목을 날렵하게 빠져나가는 앙증맞은 소형 전기차가 나란히 신호 대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행거리가 얼마나 긴가' 혹은 '충전이 얼마나 빠른가'라는 기술적 수치 경쟁에 매몰되었던 전기차 시장은 이제 다른 얘기가 된다. 체급별 대전(大戰)의 시대를 예상해본다.
도로 위의 펜트하우스, 초대형 럭셔리의 역습
전기차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자리는 단연 '풀사이즈(Full-size) SUV'들이 차지했다. 그 정점에는 최근 국내 소비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IQ가 서 있다. 내연기관 시대 '부의 상징'이었던 에스컬레이드는 전동화를 거치며 더욱 거대해지고 호화로워졌다. 전장 5715mm, 휠베이스 3460mm라는 압도적인 수치는 이 차를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움직이는 건물'로 인식하게 만든다. 200kWh가 넘는 배터리를 탑재해 1회 충전으로 서울과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수준의 주행거리를 확보했고, 운전석부터 조수석까지 이어지는 55인치 디스플레이는 탑승자를 압도한다. 2억7000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은 진입 장벽이라기보다, 소유주의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훈장에 가깝다.
이 거함에 맞서는 국산 대표 주자는 기아 EV9이다. 2026년형으로 거듭나며 상품성을 가다듬은 EV9은 에스컬레이드 IQ보다는 작지만, 한국의 주차 환경과 도로 사정 내에서 누릴 수 있는 공간 활용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고성능 버전인 'GT' 모델의 가세는 이 체급의 경쟁이 단순히 덩치 싸움이 아님을 시사한다. 2톤이 넘는 거구가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4초대에 주파하는 모습은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르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이제 초대형 전기차 시장은 '크기'를 넘어, 누가 더 완벽한 '공간의 경험'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제공하느냐의 싸움으로 변모했다.
[COVER STORY] 2026 전기차 대전 '거함'과 '돌격대'의 공존...계급이 되는 사이즈
시장의 허리를 담당하는 중형(Mid-size)급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다. 가장 많은 소비자가 포진한 이 구간에서는 브랜드의 철학과 기술력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격전지에 독일의 정교함으로 무장한 폭스바겐과 아우디가 2026년형 모델들로 승부수를 던진다. 아우디 Q4 e-트론은 부분변경을 통해 기존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인테리어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대폭 강화했다. 화려해진 디스플레이와 증강현실 기술은 '조명 회사'라는 별명에 걸맞은 감성 품질을 전기차 시대에도 이어간다. 폭스바겐 역시 베스트셀러 ID.4의 상품성을 대폭 끌어올리는 한편, 스타일을 중시하는 소비자를 위해 쿠페형 SUV인 ID.5를 전면에 내세운다. ID.5는 SUV의 실용성에 날렵한 루프 라인을 더해, 패밀리카이면서도 하차감(내릴 때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젊은 아빠들의 마음을 공략한다.
이들과 경쟁하는 또 다른 축은 '국산차인 듯 국산차 아닌' 폴스타 4다. 뒷유리를 과감하게 없애고 카메라 시스템으로 대체한 파격적인 디자인은 혁신을 갈망하는 소비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르노코리아 부산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점은 폴스타 4가 가진 강력한 무기다. '메이드 인 부산'이라는 타이틀은 수입차의 감성을 원하면서도 유지 보수와 품질 신뢰성을 고민하는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인 절충안을 제시한다. 여기에 절대 강자 테슬라 모델 Y가 '주니퍼' 프로젝트를 통해 정숙성과 승차감을 개선하고 왕좌 수성에 나설 예정이라, 중형 전기차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품질 전쟁'이 펼쳐질 전망이다.
[COVER STORY] 2026 전기차 대전 '거함'과 '돌격대'의 공존...계급이 되는 사이즈
2026년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진짜 '게임 체인저'는 의외로 가장 작은 차급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높은 가격 장벽에 가로막혀 있던 전기차 대중화의 혈을 뚫을 '보급형 소형(Compact) 전기차'들이 대거 출격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가 야심 차게 준비 중인 '아이오닉 3(컨셉트 쓰리)'는 그 선봉에 서 있다.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3000만 원대(보조금 적용 시)의 가격표를 달고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이 차는, 사회 초년생이나 세컨드카를 찾는 이들에게 '내연기관차보다 매력적인 전기차'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할 것이다. 이미 시장에서 '캐스퍼 일렉트릭'을 통해 경형 전기차의 가능성을 확인한 현대차는 아이오닉 3를 통해 소형차 시장의 주도권을 확실히 굳히겠다는 전략이다. 캐스퍼 일렉트릭이 도심형 마이크로 모빌리티의 기준을 세웠다면, 아이오닉 3는 본격적인 장거리 주행까지 가능한 소형 전기차의 표준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수입차 진영에서는 지프(Jeep) 어벤저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브랜드 고유의 오프로드 감성과 투박한 매력을 작은 차체에 꾹꾹 눌러 담은 어벤저는, 천편일률적인 유선형 전기차 디자인에 질린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5000만 원 초반대의 가격으로 지프의 아이덴티티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은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에게 강력한 소구점이 된다. 이처럼 소형 전기차 시장은 '저렴한 차'가 아니라, '작지만 확실한 개성'을 가진 차들이 각자의 매력을 뽐내는 패션쇼장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