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체리 오모다 5, 오모다 E5가 영국의 한 자동차 판매점에 전시돼 있다. 사진=로이터
중국의 전기차(EV) 산업이 자국 시장의 절반을 장악하면서 한때 지배적이었던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의 내연기관차 판매를 붕괴시켰다. 그러나 패자는 서방 기업뿐이 아니었다. 많은 중국 레거시(Legacy) 자동차 기업들 역시 판매 감소를 겪었고, 그들은 해결책으로 국내에서 팔지 못한 내연기관차 재고를 전 세계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방 정책 입안자들이 중국의 EV 보조금과 관세에 집중하는 사이,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폴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우루과이 등지에서 중국산 내연기관차(Fossil-fuel Vehicle)와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 EV 정책이 낳은 '내연기관차 수출 폭증'
중국 컨설팅 업체 오토모빌리티(Automobility) 데이터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중국 자동차 수출에서 내연기관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76%에 달하며, 연간 총 수출 물량은 100만 대에서 올해 650만 대 이상으로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4일 로이터 통신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휘발유차 수출 붐은 폭스바겐, GM, 닛산 등 글로벌 기업들의 중국 사업을 파괴한 바로 그 EV 보조금 및 정책에 의해 촉발됐다. 중국 정부가 수많은 EV 제조사를 지원하고 치열한 가격 경쟁을 유발하면서, 국내에서 밀려난 내연기관차 생산 설비가 해외 수출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는 중국 산업 정책의 파급력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보여준다.
지난해 중국의 휘발유차(EV 및 PHEV 제외) 수출만으로도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등극했다. 수출을 주도하는 것은 SAIC, BAIC, 동풍(Dongfeng), 장안(Changan) 등 국유 레거시 자동차 거대 기업들이다. 이들은 과거 서방 기업과의 합작법인(JV) 수익에 의존했지만, BYD를 필두로 한 민간 EV 기업들이 부상하면서 합작법인의 판매가 급감하자 수출에서 활로를 찾았다.
예컨대, SAIC-GM의 중국 연간 판매량은 2020년 140만 대 이상에서 2024년 43만 5000대로 곤두박질쳤다. 반면, SAIC의 수출(대부분 자체 브랜드)은 2020년 연간 약 40만 대에서 지난해 100만 대 이상으로 급증했다.
동풍의 유럽 담당 매니저인 젤테 베르노이(Jelte Vernooij)는 동풍이 혼다 및 닛산과의 중국 합작 사업 판매가 '하향 나선'을 타는 동안, 지난해 약 25만 대에 달하는 수출 물량이 중요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국유 기업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라며 "우리가 생존할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 신흥 시장 '가격 민감성' 공략…토요타, VW 흔들린다
현재 내연기관차 수출은 EV 충전 인프라가 부족한 동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2, 3선 시장에서 활발하다. 중국 내수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진 기업들이 성장을 위한 '생명줄'로 수출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최대 자동차 수출 기업인 체리(Chery)는 2020년에서 2024년 사이에 글로벌 판매량이 73만 대에서 260만 대로 폭증했으며, 이 중 5분의 4가 휘발유차다. 중국의 10대 수출 기업 중 8개가 여전히 휘발유차를 주력으로 판매하고 있다.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AlixPartners)는 중국 자동차 기업들이 2030년까지 중국 외 지역에서 연간 400만 대의 판매 성장을 이뤄내 남미,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시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할 것으로 예측했다.
전문가들은 서방 레거시 기업들이 가장 크고 부유한 시장(미국, 유럽, 중국, 일본)에 엔지니어링 역량을 집중하고 개발도상국 시장에 구형 기술과 저렴한 차를 집중하는 동안, 중국 기업들은 더 나은 안전 기능과 소프트웨어를 갖춘 저렴한 수출 물량으로 이들의 빈틈을 공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분석가 펠리페 무노즈(Felipe Munoz)는 "레거시 자동차 제조사들은 잠들어 있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중국차 제조사들과의 진짜 전쟁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신흥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멕시코,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쉐보레, 닛산, 폭스바겐, 토요타 등 전통적인 브랜드들은 중국 기업들의 공세로 인해 판매량이 15%에서 45%까지 급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우루과이에서는 닛산의 오랜 합작 파트너인 동풍이 닛산 트럭과 동일한 플랫폼의 픽업트럭을 닛산 가격보다 약 9500달러(약 1300만 원)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며 직접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GM은 현대차와 협력하여 남미 지역 차량을 공동 개발해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은 중국발 내연기관차 쓰나미에 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