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차(Volkswagen)', 이름 자체가 자동차의 대중화를 상징했던 독일의 거인 폭스바겐이 흔들리고 있다. 수십 년간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표준'을 제시하며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던 그들이지만, 전동화라는 거대한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와 중국발 저가 공세라는 이중고 앞에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폭스바겐이 주춤하는 사이,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실속을 챙긴 일본의 토요타와 전동화 퍼스트 무버로 도약한 한국의 현대차그룹이 그 빈틈을 파고들며 글로벌 대중차 시장의 판도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빅매치' 형국으로 재편됐다. 단순히 누가 더 많은 차를 파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미래 모빌리티의 주도권을 쥐고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의 생존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폭스바겐그룹은 최근 독일 본토 공장의 폐쇄 가능성을 시사하고 고용 안정 협약을 조기 종료하는 등 고강도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이는 87년 역사상 전례 없는 일로,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방증한다. 위기의 근원은 복합적이다.
폭스바겐의 가장 큰 수익원이었던 중국 시장에서 BYD를 필두로 한 로컬 브랜드에 밀려 시장 점유율이 급락했고, 야심 차게 추진했던 전기차 라인업 'ID.시리즈'는 소프트웨어 결함과 밋밋한 상품성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특히 자회사 '카리아드(Cariad)'의 소프트웨어 개발 지연은 신차 출시 일정 전체를 꼬이게 만들며 그룹의 미래 경쟁력을 갉아먹었다. 폭스바겐은 이제 '생존을 위한 다이어트'와 '본질로의 회귀'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 수익성을 방어하는 한편, 2만5000유로 이하의 보급형 전기차 'ID.2all'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려 한다.
이는 과거 비틀과 골프가 그랬듯, 합리적인 가격에 탄탄한 주행 성능을 제공하는 '진정한 국민차'의 지위를 전기차 시대에도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중국 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북미 시장 공략을 위해 부활시킨 '스카우트(Scout)' 브랜드의 안착 여부와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 'SSP'의 성공적인 도입이 늦어진다면 왕좌 탈환은 요원할 수 있다.
반면, 폭스바겐의 영원한 라이벌 토요타는 '느림의 미학'을 증명하며 역대급 실적 잔치를 벌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기차 전환에 소극적이라며 '노키아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전기차 수요 정체기(Chasm)가 찾아오자 상황은 반전됐다. 토요타 아키오 회장이 주창한 '멀티 패스웨이' 전략, 즉 하이브리드(HEV),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전기차(BEV), 수소차(FCEV)를 모두 준비해 시장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한다는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의 높은 마진율을 바탕으로 토요타는 막대한 현금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기술에 투자할 여력을 비축했다.
그러나 토요타의 미래가 마냥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현재의 승리는 하이브리드라는 과도기적 기술에 기인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전동화 전환은 속도의 문제일 뿐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토요타의 첫 전용 전기차 bZ4X가 시장에서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점을 상기하면, 순수 전기차 경쟁력 확보는 시급한 과제다. 토요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꿈의 배터리'라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게임의 룰 자체를 바꿔버릴 기술적 우위를 통해 전기차 시장에서도 패권자가 되겠다는 계산이다. 현재의 수익성으로 시간을 벌고, 기술적 퀀텀 점프로 미래를 장악하겠다는 것이 토요타의 노림수다.
이 두 거인 사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성장을 이뤄낸 것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더 이상 선진 업체의 뒤를 쫓는 '패스트 팔로어'가 아니다. 전용 전기차 플랫폼 E-GMP를 기반으로 한 아이오닉 5, EV6, EV9 등은 세계 유수의 자동차 상을 휩쓸며 하드웨어 경쟁력에서 폭스바겐과 토요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연기관 시대에는 가성비로 승부했지만, 전기차 시대에는 '가장 사고 싶은 차'를 만드는 브랜드로 위상이 격상된 것이다.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로의 전환을 발 빠르게 선언하고, 수소 생태계 구축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미래 기술 선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유연한 생산 체계를 통해 전기차 캐즘에도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전기차 수요 둔화에 맞춰 하이브리드 생산 비중을 늘리고,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도입을 검토하는 등 실용적인 전략 수정을 마쳤다. 과제는 브랜드 파워의 지속적인 상승과 수익성 방어다. 여전히 내연기관차 대비 낮은 전기차 수익성을 개선하고,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을 만회할 인도 및 동남아 등 신흥 시장에서의 지배력 확대가 필수적이다. 또한, 글로벌 탑3 안착을 넘어 진정한 1위 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전동화 성공과 고성능 N 브랜드를 통한 팬덤 구축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
지금 글로벌 대중차 시장은 '가성비'라는 기존의 잣대 위에 '전동화'와 '디지털 경험'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더해지며 격변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뼈를 깎는 혁신으로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아야 하고, 토요타는 전동화라는 파도가 다시 들이닥칠 때를 대비한 확실한 무기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현대차그룹은 지금의 상승세를 이어가며 '도전자'를 넘어 확실한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해야 한다.
결국 이 삼국지의 승패는 누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이동의 자유'를 제공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과거 내연기관 시대의 영광에 안주하는 자는 도태될 것이며, 변화의 파도에 기민하게 올라타는 자만이 새로운 국민차의 왕좌에 앉을 수 있다. 2026년 이후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는 전기차 대중화 시대의 초입에서, 세 브랜드가 펼칠 진검승부는 자동차 산업의 미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