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번호판이 부끄러워?” 차량 가액 8000만 원 이상 법인 승용차에 연두색 번호판을 의무 부착하도록 한 제도가 시행된 지 일년이 넘었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고급차들은 이제 ‘연두색’을 새로운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작 연두색 번호판이 부착돼야 하는 차량들은 대부분 고가 수입차 또는 국산 플래그십 모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지목한 바로 그 ‘과시적 소비’의 주인공들이 연두색을 가장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다. 이 제도의 취지를 풍자하듯, 오히려 연두색은 법인의 재력과 브랜드 파워를 인증하는 계급사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번엔 지금 한국 도로에서 연두색 번호판을 가장 ‘당당하게’ 달고 있는 다섯 대의 대표 차들을 꼽아봤다.
제네시스 G90 롱휠베이스 - 국산차의 정점, 부끄러움 대신 자부심
1억4000만 원에 달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제네시스 G90은 국산차 중 연두색 번호판 부착 차량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롱휠베이스 모델은 법인 전용 차량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실제로 판매량의 70% 이상이 법인 명의로 등록된다. 국내 대기업 임원용 차량으로 사랑받는 G90은 그 위용과 실내 정숙성, 뒷좌석 리무진급 편의 사양으로 인해 ‘국산 S-클래스’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번호판이 연두색으로 바뀌어도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외제차 대신 국산 럭셔리를 선택했다”는 기업의 가치 소비 신호로 작용한다.
2억 원대 가격의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는 여전히 법인차 시장의 절대 강자다. S580 롱휠베이스 모델은 고위 임원의 전용차량처럼 활용된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신규 등록의 70% 이상이 법인 명의로 판매됐다. 부드러운 승차감, 압도적인 뒷좌석 공간, 그리고 별다른 튜닝 없이도 풍기는 ‘회장님 차’ 포스는 여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연두색 번호판이 붙더라도 이 차의 품격에는 흠집 하나 없다. 실제로 일부 임원들은 “차가 좋으면 번호판 색은 안 보인다”는 반응을 보인다.
BMW의 플래그십 7시리즈는 특히 740i xDrive 모델이 법인 구매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1억5000만 원 내외의 가격이지만, 브랜드 이미지와 첨단 옵션, 강력한 파워트레인으로 인해 법인차 시장에서 꾸준히 선택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국내 7시리즈 등록 차량 중 약 65%가 법인 명의다. BMW코리아는 이를 의식한 듯, 세제 혜택 활용과 감가상각 가이드까지 고객사에 적극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연두색 번호판? 이 차의 수평 키드니 그릴을 통과하면 색조차 고급스럽게 보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건 그냥 자랑이다.” 슈퍼 SUV의 대명사, 람보르기니 우루스는 3억 원대 가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법인 명의 등록이 많은 차량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고가 차량 법인 구매 추세 속에서 우루스의 법인 등록 비중은 상반기 기준 약 55%를 기록했다. 강남, 서초 일대 수입차 매장에서 “법인 명의, 가능하냐”는 문의가 꾸준히 이어지며, 일부 고급 브랜드는 아예 법인 고객을 위한 전담 세일즈팀을 운영 중이라는 후문이다. 우루스는 도로 위에서 연두색 번호판조차 ‘하이패션의 일부’로 소화해낸다. 번호판 색깔이 아니라, 뒷바퀴 휠 크기부터가 이미 상위 1%를 대변한다.
수입차 시장에서 가장 ‘연두색 번호판이 잘 어울리는 차’를 꼽자면, 단연 벤틀리 플라잉스퍼다. 3억 원에 육박하는 이 차량은 놀랍게도 올해 상반기 기준 등록 차량의 절반 이상이 법인 명의다. 압도적인 전면부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과 ‘날개 달린 B 엠블럼’이 연두색과 맞물리면, 일종의 유머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아, 저건 법인카드로 뽑은 차구나”라는 인식이 웃음과 동시에 질투 섞인 시선을 유도한다. 어느새 연두색 번호판은 이 차량에게 실소와 선망의 미묘한 균형을 제공하는 상징이 됐다.
제도의 시행 초기 정부는 고가 법인차에 대한 사회적 감시 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법적인 강제성이 없는 이상 실효성에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이번 대선 후보로 나선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이번에는 핑크색 번호판 공약을 들고 나왔다. 다자녀 가족의 차량에 부착하고 버스 전용 도로 통행 허가 등의 혜택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실효성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