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패션 모델들이 페라리 브랜드 의상을 입고 패션위크 페라리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고 있다. 사진=페라리
단순 이동 수단으로만 여겨졌던 자동차가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는 운전자의 취향과 안목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는 가장 크고 값비싼 장신구와 같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들은 앞다투어 패션 하우스와의 협업을 강화해 나간다. 기계 공학의 정점인 자동차와 섬세한 감각의 정수인 패션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한다.
필연적인 만남과 전략적 포석
자동차와 패션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두 분야 모두 아름다운 디자인과 정교한 소재 그리고 브랜드가 지닌 고유한 헤리티지를 기반으로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에는 단순히 자동차 시트 가죽을 명품 브랜드에서 공급받거나 차량 내부에 로고를 새기는 수준에 그쳤다면 최근의 협업은 제품의 기획 단계부터 디자인 철학의 공유까지 그 깊이가 훨씬 깊어졌다. '타는 것'에서 '입고 즐기는 것'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다.
이러한 흐름의 최전선에 서 있는 브랜드는 페라리다. 페라리는 이미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하나의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다. 페라리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정기적으로 패션쇼를 개최하며 자동차의 실루엣과 소재를 반영한 하이엔드 컬렉션을 선보인다. 페라리의 상징인 강렬한 레드 컬러와 탄소 섬유 소재를 의류에 접목해 서킷 위의 역동성을 런웨이 위로 옮겨왔다. 이는 단순히 굿즈를 파는 수준이 아니라 에르메스나 루이비통과 같은 글로벌 명품 하우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심찬 선언이다.
[브랜드열전] 질주하는 스타일, 자동차와 패션의 콜라보 행진
이미지 확대보기몽클레르와 협업해 제작한 G-클래스 x 몽클레르 컨셉트 모델 사진=메르세데스-벤츠
메르세데스-벤츠,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물다
메르세데스-벤츠 역시 패션과의 교류에 가장 적극적인 브랜드 중 하나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패션위크를 수십 년간 후원해온 벤츠는 최근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오프로더의 아이콘인 G-클래스를 활용한 프로젝트가 독보적이다. 패션 브랜드 몽클레르와 협업해 탄성 있는 패딩 소재를 차체에 씌운 작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오프화이트의 창립자 버질 아블로와 손잡고 예술적인 재해석을 가미한 모델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차를 소유하지 않은 젊은 층에게도 벤츠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힙하고 창의적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포르쉐 디자인의 정수는 가장 고전적인 패션 아이콘인 ‘체커드’ 패턴의 부활에서 정점을 찍는다. 포르쉐는 최근 911의 60주년을 기념하는 한정판 모델들의 시트와 도어 패널에 1960년대 초반 포르쉐 356과 초기 911에서 사용되었던 ‘페피타(Pepita)’ 격자무늬를 다시 도입했다. 이 작은 사각형이 엇갈리는 독특한 체크 패턴은 그 자체로 포르쉐의 클래식한 패션 감성을 상징하며, 최근 공개된 ‘911 S/T’와 같은 하이엔드 모델에서 현대적인 카본 소재와 대비를 이루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자동차 시트를 단순한 앉는 곳이 아닌, 시대를 풍미한 패션 아카이브로 승격시킨 이 시도는 올드 팬들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올드 머니 룩'의 정수를 보여주며 브랜드의 영속성을 입증했다.
최근 한국 시장에서도 이러한 자동차와 패션의 유기적인 결합을 상징하는 모델이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니(MINI) 코리아가 지난 2월 26일 공식 출시한 ‘디 올-일렉트릭 미니 쿠퍼 SE 폴 스미스 에디션’이 그 주인공이다. 1998년부터 이어온 미니와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의 협업을 집대성한 이 모델은 폴 스미스의 고향 노팅엄에서 영감을 받은 ‘노팅엄 그린’ 컬러를 루프와 그릴 등에 적용하고, 브랜드의 상징인 시그니처 스트라이프와 ‘Every day is a new beginning!’이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차량 곳곳에 녹여냈다. 특히 국내에 배정된 100대의 사전 예약 물량이 한 달 만에 완판되어 추가 물량을 긴급 공수하는 등, 패션 에디션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미니는 이번 전기차 에디션을 시작으로 하반기에는 내연기관 모델까지 선보이며 패션을 매개로 한 독보적인 팬덤 문화를 공고히 할 계획이다.한정판으로 완성되는 희소성의 가치
자동차와 패션의 협업은 이제 단순히 로고를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 수집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희귀한 예술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국민차로 불리는 피아트 500은 조르조 아르마니, 불가리, 까르띠에 등 당대 최고의 명품 브랜드들과 협업한 스페셜 에디션을 꾸준히 선보이며 자동차가 가질 수 있는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이러한 한정판 모델들은 출시와 동시에 완판을 기록하며 자동차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소장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럭셔리의 정점에 서 있는 벤틀리와 롤스로이스 같은 브랜드 역시 패션계의 비스포크 정신을 차량 제작 공정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벤틀리는 명품 향수나 패션 하우스에서나 볼 법한 섬세한 스티칭 기법과 자수 공예를 시트와 도어 트림에 적용해 마치 최고급 맞춤 정장을 입고 운전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세라티는 이탈리아의 자부심인 에르메네질도 제냐와 손잡고 세계 최초로 차량 내부에 실크 소재를 적용해 자동차 실내 인테리어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러한 시도는 브랜드가 지닌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고객들에게 대체 불가능한 특별함을 제공한다.
전동화 시대, 실내 공간이 곧 런웨이다
내연기관 시대가 저물고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동차 브랜드와 패션의 결합은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전기차는 엔진이 차지하던 공간이 사라지면서 실내 공간 활용도가 극대화됐고 이는 곧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도화지가 됐다. 운전자가 직접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되는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은 자동차 실내를 이동하는 거실이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드레스룸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동차 브랜드들은 실내 소재를 선택할 때 패션계의 최신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가죽 대신 식물성 소재나 재활용 직물을 활용해 고급스러움을 구현하는 기술은 이제 필수적인 역량이 됐다.
현대자동차는 매년 '리스타일(Re:Style)' 프로젝트를 통해 폐기되는 자동차 시트 가죽이나 에어백 등을 활용해 패션 아이템으로 재탄생시키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자동차 산업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벗고 지속 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한 패션적 접근이다.
업사이클링, 지속 가능한 가치를 향한 질주
지속가능성은 현재 자동차와 패션 두 산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자동차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부산물은 이제 패션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안전벨트를 활용한 가방이나 타이어 고무를 활용한 신발 밑창 등은 이미 대중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업사이클링 협업은 브랜드의 철학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최근에는 신진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MZ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힙하고 개성 넘치는 패션 브랜드와 손을 잡음으로써 보수적이었던 자동차 브랜드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젊은 감각을 수혈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자동차를 단순히 기술의 집약체로 보지 않고 감성과 경험의 집합체로 보는 젊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래 모빌리티와 패션의 조우
미래의 자동차는 이제 '입는 자동차' 혹은 '신는 모빌리티'로 불릴 만큼 패션과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으로 보인다. 개인용 비행체(UAM)나 퍼스널 모빌리티 기기가 보편화되는 시대에는 모빌리티 기기 자체가 패션 소품처럼 개인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또한, 증강 현실(AR) 기술을 통해 차량 외관의 디자인이나 색상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자동차는 매일 아침 골라 입는 옷처럼 기분에 따라 변화하는 패션의 정점이 될 가능성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