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는 언제나 길 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었다. 땅이 갈라지고, 진흙이 차를 집어삼키고, 바위가 바퀴를 막아설 때조차 그들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정신. 그 개척자의 철학은 1948년 첫 모델에서부터 지금까지, 랜드로버라는 브랜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랜드로버의 시작은 영국 로버(Rover)사의 한 농장에서였다. 디자이너 모리스 윌크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지프에서 영감을 받아 농작업용, 군용 모두에 적합한 차량을 만들고자 했다. 알루미늄 차체, 네모반듯한 형태, 간결한 실내 구성. 이 실용적인 차량은 곧바로 '랜드를 위한 로버'란 뜻의 '랜드로버(Land Rover)'라는 이름을 달고 정식 생산에 돌입했다.
이후 수십 년간 '시리즈 I, II, III'로 이어지는 오리지널 랜드로버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험지 정복의 아이콘이 됐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라인은 '디펜더(Defender)'라는 이름으로 정식 브랜딩된다. 왕실과 탐험가, 유엔 평화유지군에서부터 아프리카 초원의 가이드까지. 디펜더는 세계 곳곳에서 신뢰의 대명사로 통했다.
1970년, 랜드로버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는다. 정통 오프로더였던 디펜더의 한계를 넘어, 오프로드 성능과 고급스러운 온로드 승차감을 모두 충족시키는 '레인지로버(Range Rover)'를 내놓은 것이다. V8 엔진, 풀타임 4륜구동, 코일 서스펜션을 갖춘 이 모델은 프리미엄 SUV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SUV는 투박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레인지로버는 '야성 속의 우아함'이라는 모순된 가치를 통해 럭셔리 자동차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층을 만들어냈다. 이후 BMW, 벤츠, 아우디 등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SUV 라인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 것도 이 모델의 영향력이 컸다.
레인지로버 라인업은 현재 4종으로 확대됐다. 풀사이즈 플래그십인 '레인지로버', 다이내믹한 주행성을 강조한 '레인지로버 스포츠', 도시형 럭셔리 SUV '레인지로버 벨라', 콤팩트 럭셔리 SUV '레인지로버 이보크'까지. 각기 다른 개성과 크기로 다양한 고객층을 공략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과 헤리티지에만 안주하지는 않았다. 랜드로버는 SUV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더 넓은 고객층을 포용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대표적인 예가 ‘디스커버리’ 라인업이다. 1989년 처음 선보인 디스커버리는 디펜더보다 온로드에 친화적이면서도, 여전히 오프로드 성능을 유지한 실용적인 SUV였다. 7인승 구조와 높은 공간 활용성으로 가족 단위 소비자에게 어필했고, 특히 ‘디스커버리 4’는 한때 한국 수입 SUV 시장에서 볼보 XC90, 아우디 Q7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후 ‘디스커버리 스포츠’는 브랜드의 엔트리 모델 역할을 맡았다. 실내 마감이나 기술 사양은 상위 모델과의 차별이 있었지만, 랜드로버의 오프로드 철학은 그대로 이어졌고, 전방위 드라이빙 모드를 통해 초보자도 쉽게 험로를 주파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여전히 랜드로버가 SUV 브랜드라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장치였다.
최근 랜드로버는 전동화 전환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21년 모회사 재규어랜드로버는 ‘Reimagine’ 전략을 발표하며, 2036년까지 내연기관 판매를 중단하고 전 모델의 전동화를 선언했다. 디펜더 130 전기차, 레인지로버 EV 등 순수 전기 SUV가 줄줄이 예고되어 있으며, 2024년 기준으로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브랜드 역사에도 불구하고 랜드로버는 ‘신뢰성’이라는 키워드에서 종종 도마에 오른다. 각종 글로벌 소비자 만족도 조사나 내구성 순위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이력이 있고, 한국에서도 전자장비 오류나 리콜 문제로 논란을 겪은 바 있다. 이에 대해 브랜드는 OTA(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기능을 확대하고, 품질 관리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드로버가 여전히 강한 매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동차를 넘어선 '경험'에 있다. 극지 탐험, 대륙 횡단, 오지 촬영 등 브랜드가 후원하거나 실제로 사용된 사례가 많고, 이는 차량을 통해 인간의 경계를 넓히는 수단이라는 브랜드 철학으로 귀결된다. 오프로드는 이제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랜드로버가 소비자에게 약속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됐다.
오늘날의 랜드로버는 유산과 혁신, 그리고 모험과 품격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브랜드다. 모험의 대명사 ‘디펜더’, 도심과 전통의 조화를 이룬 ‘레인지로버’, 실용성과 효율성을 앞세운 ‘디스커버리’까지. 각각의 모델이 전하는 철학은 다르지만, 그 밑바탕에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랜드로버를 특별하게 만든다.
랜드로버는 단순한 SUV 브랜드를 넘어 '탐험'과 '모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하지만 급격한 전동화 전환의 흐름 속에서, 랜드로버 역시 변화가 불가피했다. 이를 위해 모회사 재규어랜드로버(JLR)는 ‘Reimagine’ 전략을 통해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핵심은 내연기관의 단계적 철수와 전동화 확대. JLR은 2036년까지 내연기관 모델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그 첫 단계로 2024년 이후 레인지로버 EV를 비롯해 디펜더 전기차, 디스커버리 전기 모델을 순차적으로 출시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OTA(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기능과 ‘인컨트롤(InControl)’ 커넥티비티 시스템을 통해 디지털 경쟁력도 강화 중이다. 기존 고객을 위한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도 제공되며, 이는 단지 신차만이 아닌 기존 차량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브랜드의 전략적 접근으로 해석된다. 전통의 오프로드 강자라는 이미지와 첨단 전동화 기술의 결합. 랜드로버는 과거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미래로 향하는 법을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