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능과 화려한 디스플레이, 그리고 수백 마력을 내뿜는 전기차들이 쏟아지는 요즘, 혼다 CR-V 하이브리드를 타는 경험은 기묘하다. 첫인상은 솔직히 심심하다. 연식 변경에 달라진 점이 없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조명 쇼도 없고 실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스크린도 없다.
하지만 이 차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깨닫게 된다. 자동차라는 물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이토록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 CR-V는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기본기'라는 뻔하지만 무서운 무기로 승부하는 차다. 오랜만에 물욕이 생기도록 하는 차다.
운전석에 앉으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시야의 해방감이다. 최근 SUV들이 디자인을 위해 윈도우 라인을 높이고 필러를 두껍게 가져가는 것과 달리, CR-V는 시야를 가리는 요소를 최소화했다. 대시보드는 낮고 평평하며 사이드미러는 도어에 달려 있어 사각지대가 거의 없다. 이는 운전이 서툰 이들에게는 자신감을, 베테랑 운전자에게는 심리적인 여유를 준다.
인테리어 역시 물리 버튼을 고집스럽게 남겨뒀다. 주행 중 화면 속 메뉴를 헤매지 않고도 직관적으로 공조 장치를 조절할 수 있는 조작계는 화려한 터치스크린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배려로 다가온다.
공간 활용성 면에서는 혼다 특유의 집요함이 빛을 발한다. 뒷좌석 문이 거의 90도에 가깝게 열리는 것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거나 큰 짐을 실을 때 느껴지는 압도적인 편의성은 한 번 경험하면 다른 차로 돌아가기 힘들게 만든다.
트렁크 용량 역시 동급 최고 수준이지만, 단순히 넓은 것을 넘어 바닥 높이가 낮아 무거운 짐을 싣기에도 최적화돼 있다. 최근 핫한 모델들인 팰리세이드나 아이오닉 9 같은 대형 SUV들이 주는 거대한 공간감과는 또 다른, 철저히 실용에 기반한 영리한 공간 설계다. 혼다가 이런 걸 잘한다.
[육기자의 으랏차차] 혼다 CR-V 하이브리드, 자극적인 마라맛 세상 속 '평양냉면' 같은 SUV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작동 방식도 독특하다. 혼다의 2모터 시스템은 엔진이 주연이 아닌 조연에 가깝다. 대부분의 일상 주행에서는 전기 모터가 차를 이끌고 엔진은 오직 전기를 만드는 발전기 역할에 충실하다. 덕분에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의 반응이 전기차처럼 매끄럽고 즉각적이다. 그러다 고속 크루징 단계에 접어들면 엔진이 바퀴와 직접 연결되어 효율을 극대화한다.
이 과정은 너무나 매끄러워서 운전자가 계기판을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지금 엔진이 도는지 모터가 도는지 알아채기 힘들다. 폭발적인 성능은 아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운전자가 의도한 만큼 정확하게 속도를 붙여주는 신뢰감이 돋보인다.
혼다 CR-V 하이브리드는 '자동차라는 도구'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모델이다. 타는 내내 감탄사가 터지지는 않지만, 내릴 때마다 "참 내 차처럼 편하다"라는 혼잣말이 나온다. 자극적인 양념에 지쳐 결국 평양냉면의 슴슴한 육수를 찾게 되는 것처럼, 화려한 기술의 피로도 속에서 CR-V는 가장 담백하고 믿음직한 이동의 수단이 되어준다. 튀고 싶지는 않지만 절대 실패하고 싶지도 않은, 합리적인 평화주의자들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선택지는 흔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