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리’와 ‘패밀리’를 같은 문장에 넣는 순간부터 잘못됐다. 페라리는 늘 ‘꿈’이었다. 주유소에서 골드카드를 꺼낼 때 절대 떠올려선 안 되는 이름, 빨간색과 폭발음으로 대변되는 그 ‘비현실’. ‘간지’ 그 자체다. 그런데 이 차, 푸로산게(Purosangue)는 접근법이 조금 다르다.
첫인상의 푸로산게는 ‘그리지오 티타노’ 컬러를 입고 있었다. 얼마전 압구정에서 본 것도 같은 바로 그 차다. SUV라는 걸 눈치채는 데는 0.3초가 걸리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페라리의 향취가 콧속을 찌른다. 근데, 올드 스파이스처럼 클래식한 정향 느낌은 아니다. 길게 뻗은 보닛, 날렵한 헤드램프, 그리고 부풀어 오른 휀더가 익숙하지만, 또 어색하다.
사실 페라리는 이 차를 SUV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포츠카의 새로운 형태”다. 듣기엔 약간 뻔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타보면 살짝 이해가 되긴 한다. 다만, 자존심 문제일 뿐 SUV에 양보한 건 앉은 키가 살짝 높은 것, 방지턱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도어 여는 방식 뿐이다.
리어 도어는 ‘코치 도어’, 즉 뒤로 열리는 방식이다. 아이를 안고 타는 부모를 배려했다는 페라리의 설명에 눈물이 날 뻔했다. 페라리가 이렇게 자상했던가? 하지만 브랜드를 처음 접한 졸부에게는 꽤나 설득력 있는 요소다. 도어를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낮은 시트 포지션, 두툼한 센터터널, 마네티노 다이얼이 박힌 스티어링 휠 등은 여전히 페라리라는 걸 증명한다. 그리고 뒷좌석은 독립식 버킷 시트로 진심 어린 ‘배려’를 시연한다.
실용성이 생각보다 괜찮다. 뒷좌석은 성인 두 명이 앉을 정도. 하지만, 레그룸이나 헤드룸 때문에 권하지는 않는다. 트렁크 용량도 473리터. 심지어 ISOFIX까지 있다. ‘킨더가든 익스프레스.’ 유치원 앞에서의 하차감이 곧 친구들의 부러움과 신뢰를 한 방에 살 수도 있을 거다.
스타트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시 꿈속에 빠진다. 6.5리터 자연흡기 V12 엔진을 깨우면 차 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속사포 랩으로 포르쉐 타이칸을 디스하는 느낌이다. 타협은 이쯤에서 물러난다. 페라리의 고집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이 차는 우렁찬 사운드와 함께 725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한다. 0→100km/h 제로백은 단 3.3초에 끊는다. SUV? 패밀리카? 모든 게 농담처럼 들릴 수 있다. 페라리는 이걸 위해 무게 중심을 최대한 낮추고, 엔진은 앞에, 변속기는 뒤에 두는 미친 집념(프론트 미드십 + 트랜스액슬)까지 발휘했다. 무게 배분은 거의 완벽한 49:51. 무슨 짓을 한 건지, 이쯤 되면 그냥 ‘하이힐 신은 슈퍼카’에 가깝다. 카이엔과 우루스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
마음먹고 가속 페달을 밟으면 머리통이 시트에 묻힌다. V12는 마치 미친 듯 회전수를 끌어 올린다. 와인딩 코스로 들어서면, 페라리의 액티브 서스펜션이 본색을 드러낸다. 코너에서 차체는 거의 기울지 않는다. SUV를 몰고 있다는 사실도 서서히 잊혀진다. 그리고 사운드. 4000rpm까지는 중저음의 웅음이 나고 7000rpm을 넘기면 금속성 고음으로 목을 찢는다.
페라리는 이 차를 통해 ‘패밀리와 페라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했다. 흔히 SUV로 성공한 슈퍼카 브랜드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딘가 타협이 느껴졌다. 푸로산게는 조금 다르다. 이 차는 스포츠카의 본질을 SUV의 틀에 억지로 욱여넣은 게 아니라, 그 틀 자체를 스포츠카로 재정의해버린 느낌이다.
다시 현실을 마주하면, 페라리 푸로산게의 기본 가격은 약 5억 원대다. 여기서 옵션을 한두 개만 눌러도 6억 원이 훌쩍 넘고, 이건 빼면 창피해 정도의 ‘나, 멋져’ 옵션이 들어가면 견적은 기본 7억 원 언저리에 도착한다. 이쯤 되면 머릿속에선 꿈속과 현실을 혼란스러워하는 괴상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나도 살 수 있을까?", "사도 괜찮겠다." 이 모든 현실적인 부담에도 불구하고, 푸로산게는 강력하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왜냐면 이 차는 여전히 ‘페라리’이니까.
V12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고, 아이를 태운 채 마네티노를 ‘스포츠’로 돌려볼 수 있다면? 총각도 아닌 아빠가 된 지금, 식욕보다 소유욕이 더 앞지른 지금. 영혼까지 탈탈 털어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을 계산해본다. ‘쉣!’ 한참 모자르다! 이번 생에는 어찌, 카푸어가 될 상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