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이펠 산맥 깊숙이 자리한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Nürburgring Nordschleife)는 총 길이 20.8km, 73개의 코너, 최대 경사도 17%라는 혹독한 조건으로 ‘그린 헬(Green Hell)’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참고로 용인 스피드웨이의 길이는 4.5km에 코너수 17개가 있다.
뉘르부르크링 서킷은 극한의 환경에서 자동차의 퍼포먼스를 검증하는 궁극의 실험실이자, 글로벌 브랜드들이 기술력을 겨루는 상징적인 무대로 평가된다. 한 번의 완주만으로도 엔진, 브레이크, 서스펜션, 타이어 등 모든 요소가 한계까지 밀어붙여지기 때문이다. 이곳을 견뎌낸 차만이 진정한 고성능 모델로 인정받는다.
랩타임 경쟁의 역사: 브랜드 자존심의 싸움
1990년대 이후 뉘르부르크링은 슈퍼카와 하이퍼카 개발의 ‘시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포르쉐, BMW, 메르세데스-AMG 같은 독일 브랜드뿐 아니라, 페라리·람보르기니 같은 이탈리아 슈퍼카 메이커들도 잇달아 이 서킷으로 향했다.
초창기에는 테스트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기록 경쟁이 불붙으면서 “누가 가장 빠른가”를 둘러싼 ‘랩타임 전쟁’으로 확장됐다. 랩타임은 곧 브랜드의 기술력과 자존심을 증명하는 도구가 됐고, 소비자들에게는 “서킷에서 가장 빠른 차”라는 타이틀이 곧 ‘구매 욕망’을 자극하는 마케팅 포인트가 됐다.
양산차 부문: 도로 위 괴물들의 순위
현재 양산차 중 최강자는 메르세데스-AMG 원(6분29초090)이다. F1 파워트레인을 기반으로 한 이 하이퍼카는 포뮬러 기술을 도로로 옮긴 결정체로, AMG의 ‘기술력 과시’를 상징하는 모델이다. 뒤이어 포르쉐 911 GT2 RS 만타이 패키지(6분43초)와 AMG GT 블랙 시리즈(6분 48초)가 포디움을 차지했다. 여기에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SVJ(6분 49초), 포드 머스탱 GTD(6분 52초)가 상위권에 포진하며 브랜드 간의 자존심 경쟁을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샤오미 SU7 울트라(7분 04초)다. 전기차임에도 불구하고 AMG GT R 프로를 위협하는 랩타임을 기록하며 ‘전동화 시대의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프로토타입 부문은 ‘극한의 실험실’에 가깝다. 이들은 도로 주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기록 경신을 위해 태어난 머신들이다. 포르쉐 919 하이브리드 에보(5분19초)는 WEC 르망 레이스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차로, 지금까지 이 서킷에서 기록된 가장 빠른 랩타임을 보유하고 있다. 폭스바겐의 전기 프로토타입 ID.R(6분05초)는 내연기관 슈퍼카를 압도하며 EV 시대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모델이 됐다. 최근에는 로터스 에비야 X(6분24초)와 샤오미 SU7 울트라 프로토타입(6분22초)이 뒤를 잇고 있으며, 뉘르부르크링은 점점 전기 파워트레인 중심의 경쟁 무대로 재편되고 있다.
랩타임이 바꾼 슈퍼카 시장
이제 뉘르부르크링 랩타임은 단순히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빠른 랩타임은 곧 브랜드의 엔지니어링 역량을 대중에 각인시키는 가장 직관적인 지표로 기술력을 인증한다. 게다가 “뉘르부르크링 최단 기록”이라는 한 줄은 전 세계 소비자에게 강력한 구매 포인트로 작용한다. 각 제조사는 이 기록을 위해 더욱 과감한 경량화, 공력 성능 개선, 전자제어 기술을 적용하며 자동차 기술 전반을 진화시킨다.
결국, 이 경쟁은 고성능 모델뿐 아니라, 그 기술이 보급형 모델로 확산되는 촉매제가 된다. 예컨대 포르쉐의 공력 패키지와 브레이크 기술은 카이엔과 마칸 등 SUV에도 적용되고 있다.
최근 주목할 점은 전기차의 약진이다. 배터리 무게와 열관리 등 단점에도 불구하고 EV는 특유의 즉각적인 토크와 낮은 무게 중심 덕분에 뉘르부르크링에서 의외의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특히, 폭스바겐 ID.R이 내연기관 슈퍼카를 제친 것은 상징적이었다. 이후 로터스 에비야 X와 샤오미 SU7 같은 전기차 브랜드가 속속 도전장을 던지며, ‘그린 헬’은 전동화 경쟁의 최전선으로 바뀌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EV 특화 섀시와 열관리 기술의 발전이 뉘르부르크링의 판도를 뒤흔들 것”이라고 전망한다. 포르쉐, 메르세데스-AMG, BMW도 전기 하이퍼카를 서킷 테스트에 투입하며 대비에 나선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