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시장이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라는 조정기를 겪으며 하이브리드 차량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사이, 수면 아래에서는 한국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거대한 지각 변동이 감지됐다. 그 진앙은 2026년(丙午年)이다. 최근 중국 지리자동차(Geely) 산하의 프리미엄 브랜드 '지커(Zeekr)'가 한국 진출을 공식화하며 던진 출사표가 지난 수십 년간 굳건히 지켜온 현대차·기아의 입지를 뒤흔들 수 있다. 혁신의 아이콘 테슬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커(Zeekr), '중국차'의 편견을 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단연 중국 브랜드의 움직임이다. '저렴한 맛에 타는 차'라는 중국차에 대한 오래된 편견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지리자동차 그룹의 최상위 프리미엄 브랜드인 지커는 최근 에이치모빌리티ZK, 아이언EV, KCC모빌리티 등 국내 유력 딜러사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한국 시장 상륙을 공식화했다. 아우디, 폭스바겐 등 수입차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 딜러사가 지커를 선택했다는 것은, 상품성과 A/S 인프라 구축 가능성을 이미 검증했다는 방증이다.
지커가 내세우는 선봉장은 준대형 슈팅브레이크 '지커 001'과 중형 SUV '지커 7X'다. 특히 2026년 한국 시장의 핵심 키(Key)가 될 '지커 7X'는 현대차 아이오닉 5, 테슬라 모델 Y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체급이다. 800V 고전압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초고속 충전 기술과 화려한 인테리어, 그리고 중국 현지 기준 5000만 원대라는 공격적인 가격 책정은 국내 소비자들의 '가성비'와 '가심비'를 동시에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세계 1위 전기차 업체 BYD 역시 중형 SUV '씨라이언 7'을 위시하여 2026년 한국 승용차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예정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브랜드는 폴스타(Polestar)다. 지리차와 볼보의 합작사로 탄생한 폴스타는 '중국차'와 '유럽차'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폴스타는 르노코리아 부산 공장에서 주력 모델인 '폴스타 4'를 위탁 생산하며 '국산차' 지위를 획득, 관세 장벽을 넘고 한국 소비자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는 승부수를 던졌다.
폴스타는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할 것을 선택하며 '탈중국' 이미지를 섞는 고육지책도 쓰고 있지만, 2026년 시장에서의 성패는 소비자가 이 복잡한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안방 주인인 현대차그룹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2026년은 현대차그룹에게 있어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의 성숙기이자,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원년이다. 그 중심에는 플래그십 대형 SUV '아이오닉 9'과 고성능 브랜드 '제네시스 마그마(Magma)'가 있다.
올해 출시된 아이오닉 9은 기아 EV9이 닦아놓은 대형 전기 SUV 시장을 완성하는 모델로, 넓은 실내 공간과 국산차 특유의 풍부한 편의 사양을 무기로 '패밀리 전기차' 수요를 흡수하고 있다.
더 주목할 점은 제네시스의 고성능 라인업 '마그마'다. 2026년 1월 출시 예정인 'GV60 마그마'는 단순한 스펙 싸움을 넘어, 모터스포츠에서 축적한 주행 감성과 헤리티지를 강조한다. 중국 브랜드가 자본력으로 스펙을 따라잡을 수는 있어도, 오랜 시간 축적된 브랜드의 '스토리'와 '주행 질감'은 단기간에 복제할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동시에 기아는 EV3, EV4, EV5로 이어지는 보급형 라인업을 통해 가격 경쟁력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절대 강자 테슬라 역시 2026년을 벼르고 있다. 노후화된 모델 Y의 상품성을 대폭 개선한 부분변경 모델 '주니퍼(Juniper)' 프로젝트가 2026년 한국 시장을 휩쓸 준비를 마쳤다. 승차감 개선, 소음 차단 강화, 앰비언트 라이트 적용 등은 그동안 테슬라의 약점으로 지적되던 감성 품질을 보완하며 경쟁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수는 소프트웨어다.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 소프트웨어 FSD(Full Self-Driving)가 한국 규제의 벽을 넘어 본격적으로 도입된다면, 이는 하드웨어 스펙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2026년은 테슬라가 단순한 전기차 제조사를 넘어 AI 로보틱스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한국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해가 될 공산이 크다.
소비자의 선택이 만들 2026년의 풍경
2026년, 현대차와 기아라는 거대한 성벽, 그 성벽을 넘으려는 지커와 BYD의 파상공세, 그리고 하늘에서 판을 흔드는 테슬라까지. 중국차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합리적 소비'라는 명분 아래 무너질 것인지, 아니면 현대차의 기술력과 테슬라의 혁신이 방어선을 지켜낼 것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