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전기차 춘추전국시대’의 1막이 내렸다. 무수히 많은 스타트업이 화려한 청사진을 들고 시장에 난립했지만, 2025년의 태양은 오직 생존한 자들만을 비다. 이제 시장은 냉정하게 재편됐다. 내연기관의 유산을 짊어진 레거시 브랜드들의 전동화 전환과는 결이 다른, 태생부터 배터리와 모터로 심장을 뛰게 만든 ‘순수 전기차 혈통(Pure EV Players)’들의 진검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시장의 규칙을 창조한 절대자 테슬라, 차가운 기술 위에 스칸디나비안의 낭만을 입힌 폴스타, 그리고 죽음의 계곡을 건너 모험가들의 우상이 된 리비안. 이들 세 브랜드가 그리는 2026년의 도로는 서로 다른 색깔의 미래로 점철돼 있다.
테슬라: 자동차를 넘어선 거대한 문명
현재 시점에서 테슬라를 단순히 자동차 제조사로 정의하는 것은 이제 낡은 발상이 됐다. 일론 머스크가 20여 년 전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제 거대한 문명이 되어 전 세계의 도로와 에너지 흐름을 지배하고 있다. 테슬라는 ‘이동 수단’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그들은 도로 위의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거대 기술 기업이다.
테슬라의 가장 무서운 점은 ‘표준의 장악’에 있다.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충전 규격 전쟁은 테슬라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북미의 NACS 표준화는 테슬라의 슈퍼차저 네트워크가 단순한 충전소가 아니라, 전기차 시대의 주유소이자 혈관임을 증명했다. 경쟁사들이 충전기 설치와 유지보수에 허덕일 때, 테슬라는 이미 깔아놓은 인프라 위에서 여유롭게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배포한다.
제조 공정에서의 혁신 또한 그들을 ‘넘사벽’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거대한 차체를 붕어빵 찍어내듯 한 번에 주조하는 기가 프레스 공법과 부품의 모듈화는 제조 단가를 극단적으로 낮췄고, 이로써 경쟁사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마진율과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모델 Y가 전 세계 베스트셀링카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공학적 승리였다.
하지만 테슬라의 진짜 무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또 있다. 전 세계 수백만 대의 테슬라 차량이 매일 긁어모으는 주행 데이터는 자율주행(FSD)이라는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거대한 먹이로 인식된다. 테슬라를 타는 소비자는 단순히 차를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AI를 함께 키우고 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것이다. 비록 단차 이슈가 여전하고 인테리어는 지나치게 간결하다 못해 삭막할지라도, 소비자들이 테슬라를 선택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가. 테슬라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진보된 ‘움직이는 전자제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슬라가 이성과 효율, 그리고 숫자로 대변되는 미래를 그린다면, 폴스타는 그 대척점에서 ‘감성’과 ‘미학’을 외친다. 볼보의 고성능 레이싱 팀에서 출발한 이 브랜드의 DNA에는 태생적으로 ‘달리는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새겨져 있다. 2025년의 폴스타는 더이상 볼보의 그늘에 있는 서브 브랜드가 아니다. 그들은 ‘전기차계의 포르쉐’를 꿈꾸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폴스타의 전략은 꽤 괜찮았다. 공장을 짓는 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대신, 모기업인 지리홀딩스와 볼보의 생산 시설을 공유하는 ‘에셋 라이트(Asset-light)’ 전략을 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낀 자원을 디자인과 주행 질감(Performance)을 다듬는 데 올인했다. 그 결과 폴스타의 차량들은 전기차 특유의 이질감이 없다. 엑셀을 밟았을 때 목이 꺾이는 가속력보다는, 운전자가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핸들링과 서스펜션의 조율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올린즈 댐퍼와 브렘보 브레이크로 무장한 퍼포먼스 팩은 이들이 여전히 레이싱 트랙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디자인 역시 폴스타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전직 디자이너 출신 CEO가 이끌었던 브랜드답게, 폴스타의 디자인은 불필요한 장식을 모조리 걷어낸 ‘순수주의’를 지향한다. 특히, 최근 출시된 폴스타 4에서 뒷유리를 과감하게 없애고 카메라로 대체한 파격은 폴스타가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기술은 그 자체로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철학. 이것이 바로 테슬라의 차가움에 지친 프리미엄 소비자들이 폴스타에 열광하는 이유다. 폴스타는 전기차도 충분히 섹시하고, 아름답고, 운전자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지난 5년은 전기차 스타트업들에게 ‘죽음의 계곡’이었다. 피스커가 쓰러지고, 로즈타운이 문을 닫는 동안 굳건히 살아남아 자신만의 성을 쌓은 브랜드가 있다. 바로 리비안이다. 리비안의 생존 비결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동차답지 않은 접근법’에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를 판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팔았다.
리비안은 테슬라가 놓친 빈틈, 바로 ‘아웃도어’와 ‘모험’이라는 키워드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미국에서 먹히는 방법이다. 테슬라의 사이버트럭이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장갑차처럼 보일 때, 리비안의 R1T와 R1S는 숲속 캠핑장과 거친 계곡에 어울리는 ‘친근한 몬스터’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동그란 헤드램프가 주는 선한 인상 뒤에는 그 어떤 오프로드도 주파할 수 있는 강력한 쿼드 모터 시스템이 숨겨져 있다. 차체 측면에 뚫어놓은 ‘기어 터널’에 캠핑용 키친을 수납하게 만든 아이디어는 전 세계 아웃도어 마니아들을 열광시키기에도 충분했다.
리비안은 ‘자동차계의 파타고니아’가 됐다. 소비자들은 리비안을 타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환경을 생각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된 모험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낸다. 아마존이라는 거대 파트너와의 협업으로 상용 밴 시장까지 장악하며 현금 흐름을 확보한 것도 주효했다. 2025년 공개된 보급형 모델 R2와 R3는 리비안이 소수의 럭셔리 브랜드를 넘어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도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제 리비안은 단순한 스타트업이 아니다. 그들은 테슬라와는 다른 방식의 ‘팬덤’을 거느린, 문화적 현상이 됐다.
스펙의 종말, 캐릭터의 시대
이제 제로백이 3초냐 2초냐, 주행거리가 500km냐 600km냐 하는 숫자놀음의 시대는 끝났다. 상향 평준화된 기술의 고원 위에서 소비자는 이제 ‘브랜드의 영혼’을 산다.
2026년을 바라보는 지금, 이 순수 전기차 브랜드들의 경쟁은 마치 성격이 다른 세 명의 친구를 보는 듯하다. 테슬라는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한 천재 공학자 같고, 폴스타는 옷 잘 입고 세련된 감각을 지닌 예술가 같으며, 리비안은 주말마다 배낭을 메고 산으로 떠나는 건강한 탐험가 같다.
내연기관 시대에 벤츠와 BMW, 아우디가 각기 다른 매력으로 100년을 경쟁했듯, 전기차 시대의 새로운 '빅 3' 역시 각자의 뚜렷한 캐릭터로 시장을 삼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소비자로서는 즐거운 고민. 차가 곧 당신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을 대변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