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 SL을 시승했다. 1950년대부터 이어진 긴 역사 속에서 SL은 늘 ‘스타일과 기술의 아이콘’으로 자리해왔다. 클래식카 수집가들의 꿈인 300SL ‘걸윙’부터, 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한 고성능 SL55 AMG,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SL은 벤츠가 가장 공들여 만든 ‘열정의 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국내 시승한 SL 43은 AMG 라인업 엔트리급에 해당하는 모델이다. 하지만, ‘43’이라는 숫자에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다. F1 기술을 이식한 전동식 터보차저(Electric Exhaust Gas Turbocharger) 덕분에 만만치 않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시승차는 AMG 특유의 파나메리카나 그릴을 전면에 달고 나타났다. 긴 보닛, 짧은 리어 오버행, 그리고 낮게 깔린 자세는 ‘이 차는 로드스터다’라는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준다. SL은 과거에는 전동식 하드톱을 썼지만, 이번 세대부터는 소프트톱으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경량화와 디자인의 순수성 때문이다. 실제로 톱을 닫았을 때의 실루엣은 쿠페처럼 매끄럽고, 톱을 열었을 때는 차체 라인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살아난다.
실내로 들어서면 AMG 특유의 고급감을 확인할 수 있다. 12.3인치 계기판과 11.9인치 세로형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 고급 가죽과 알칸타라로 마감된 시트, 그리고 두툼한 AMG 스티어링 휠이 조화를 이룬다.
도심을 달릴 때 SL 43은 ‘소프트한 슈퍼스타’에 가깝다. 9단 자동변속기와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맞물리며 출발은 매끄럽고 조용하다. 4기통이라는 선입견은 곧 사라진다. 터보랙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엔진은 마치 6기통 이상을 다루는 듯한 탄력이다. 특히 F1에서 가져온 전동식 터보는 저회전부터 부드럽게 토크를 뽑아내는 게 인상적이다.
지붕을 닫았을 때는 오픈카치고는 꽤 괜찮은 정숙성이 확보된다. 바람 소리와 노면 소음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설계 완성도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15초만에 개폐가 되는 소프트톱이지만 단단한 차체 강성 덕분에 요철 구간에서도 삐걱거림이 없고, 차체 전체가 묵직하게 반응한다. 시속 60km 미만에서는 전동으로 작동이 가능하다.
본격적으로 엔진을 달궈보려면 고속도로와 교외 와인딩 로드가 적절하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로 전환하면 배기음이 한 톤 낮아지고, 스티어링의 무게감도 확연히 달라진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으면 381마력의 출력이 단박에 후륜으로 쏟아진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약 4.9초. 수치만 놓고 보면 AMG의 상위 모델보다 느릴 수 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머리 위로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순간, 체감 숫자는 간극을 좀 줄인다.
와인딩에서는 AMG다운 섀시 밸런스가 빛을 발한다. 차체가 낮게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어링은 예리하고, 코너 진입 시 차체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4기통 엔진 특유의 가벼운 무게 배분은 오히려 앞부분을 더 가볍게 만들어, 코너에서의 방향 전환이 민첩하다. 여기에 AMG 라이드 컨트롤 서스펜션이 노면을 탄탄히 읽어내며, 스포츠카다운 날카로움과 GT카다운 여유를 동시에 보여준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가격이다. 국내 출시가는 약 1억4000만 원대로, SL 55 AMG나 SL 63 AMG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다. “전통의 SL을 경험하고 싶지만 상위 AMG 모델은 부담스럽다”는 소비자에게 현실적 대안이 된다. 이쯤 되면 “SL은 여전히 드림카인가?”라는 질문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답은 “그렇다.” 드라이빙은 빠른 것만이 다가 아니다. 이번 SL 43은 이상을 좀 더 가까운 곳에 두려고 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