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쿤타치 올드 & 뉴(람보르기니 쿤타치 LPI 800-4) 사진=오토모빌리 람보르기니
자동차 산업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몇 년간은 ‘과거로의 회귀’가 트렌드로 떠올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모델들이 단종의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전동화와 디지털화로 급변하는 시장 속에서도 브랜드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되살리기 위한 전략적 복귀다. 전설의 귀환을 알린 모델들을 살펴본다.
포드 브롱코는 이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이끈 모델이다. 1966년 등장한 1세대 브롱코는 오프로드 SUV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만, 1996년 5세대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25년간의 공백 끝에 2021년 부활한 신형 브롱코는 과거의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주목받았다. 탈부착식 도어와 루프, 전용 오프로드 하드웨어, ‘G.O.A.T.’ 지형 모드 등으로 무장한 브롱코는 레저 시장의 열풍을 다시금 주도하며 지프 랭글러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있다.
랜드로버 디펜더 역시 오랜 팬들의 기다림 끝에 돌아왔다. 1948년 시리즈 I에서 시작된 디펜더는 클래식 오프로더의 대명사였지만 2016년 단종을 맞았다. 그러나 2020년 새롭게 등장한 신형 디펜더는 과거의 상징성을 유지한 채 현대적 기술을 적극 수용했다. 알루미늄 모노코크 차체 ‘D7x’를 기반으로 한 강성은 전 세대를 압도하며, 전자식 지형 반응 시스템과 첨단 편의 장비를 결합해 전천후 프리미엄 SUV로 변신했다. 도강 능력은 900mm, 진입각·이탈각·브레이크오버각은 동급 최고 수준으로, 오프로드 DNA를 잃지 않은 채 완전히 새로워진 모델로 평가받는다.
토요타 수프라의 부활은 스포츠카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안겼다. 1998년 A80 세대를 끝으로 단종되었던 수프라는 2019년 GR 수프라로 돌아왔다. BMW Z4와 공동 개발한 파워트레인과 플랫폼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완성도와 성능으로 논쟁을 잠재웠다. 직렬 6기통 3.0리터 터보 엔진과 2.0리터 터보 모델을 구성해 운전의 즐거움을 계승했고, 2023년에는 수동 변속기 옵션까지 도입하며 수프라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단순히 이름만 되살린 것이 아니라, 운전 재미라는 본질을 현대 기술로 재해석한 점에서 의미가 깊다.
GMC 허머의 귀환은 방향성부터 달랐다. 연비 문제와 과도한 덩치로 2010년 단종됐던 허머는 2020년 공개된 허머 EV를 통해 ‘전기 괴수’로 재탄생했다. 최대 1000마력에 달하는 출력, 세 개의 전기 모터, 한 번 충전으로 529km 이상 달리는 주행거리, 그리고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크랩워크(CrabWalk)’ 기능까지 더해 과거의 과잉 이미지를 오히려 새로운 기술 쇼케이스로 활용했다. ‘전동화 시대에도 오프로더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허머 EV는 전기차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구축하고 있다.
2026년형 지프 체로키 역시 잠깐의 단종을 거쳐 돌아온 케이스다. 2023년 생산을 중단한 이후 새롭게 재정비된 체로키는 STLA Large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이브리드 전용 파워트레인을 탑재하고 돌아왔다. 1.6리터 터보 엔진과 두 개의 전기 모터를 결합해 210마력의 시스템 출력을 발휘하며, 복합연비는 약 37mpg, 주행거리는 500마일 이상에 달한다. 기본 탑재되는 지프 액티브 드라이브(Jeep Active Drive I 4x4) 시스템과 다양한 주행 모드를 통해 체로키 특유의 오프로드 성능을 유지하면서도, 공간성과 효율성을 대폭 강화했다. 디자인 역시 과거 XJ 체로키의 박스형 실루엣을 오마주하며 정체성을 한층 공고히 했다.
1972년 첫 출시 이후 유럽 해치백 시장을 평정했던 르노 5가 30년 가까운 공백을 깨고 전기차로 돌아온다. 2025년 출시 예정인 르노 5 E-Tech는 레트로 디자인과 최신 전동화 기술을 결합해, 르노의 소형차 전략을 완전히 재편하는 모델이다.
새 르노 5는 CMF-B EV 플랫폼을 기반으로, 52kWh 배터리 팩과 134마력 전기모터를 탑재했다. 주행거리는 WLTP 기준 약 400km로 예상되며, 가격은 약 2만 유로(한화 약 2,900만 원) 수준으로 책정됐다. 오리지널 르노 5의 상징성을 계승한 해치백 비율과 독창적인 헤드램프 디자인은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전동화 시대에 맞춘 실속형 EV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람보르기니 쿤타치 LPI 800-4: ‘양산 부활’이 아닌 112대 한정 헌정작
람보르기니 쿤타치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부활’을 상징한다. 1970년대 슈퍼카 아이콘으로 군림했던 쿤타치는 2021년 LPI 800-4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지만, 양산 모델이 아니라 112대 한정판 헌정작이다. 전설적 디자인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6.5리터 V12 엔진과 48V 슈퍼캐패시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해 총 814마력이라는 엄청난 성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델은 브랜드의 상징성을 기념하기 위한 ‘오마주’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