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화의 상징이었던 피아트 500e가 다시 내연기관을 장착하고 돌아온다. 수요 부진으로 수차례 생산 중단을 겪었던 500e의 부진을 인정한 피아트는 지난해 말, 기존 전기차 플랫폼에 가솔린 엔진을 얹은 ‘500 하이브리드’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토리노 미라피오리(Mirafiori) 공장에서는 이미 시험 생산이 시작됐으며, 오는 11월부터 양산차가 본격 출고된다. 연말까지 약 5000대가 출하될 예정이다.
피아트 CEO 올리비에 프랑수아는 새 모델을 가리켜 “현실적인 소비자를 위한 500, 실용적인 500”이라고 표현했다. 이탈리아 현지 기준으로 시작가는 1만7000유로(약 2730만원)로, EV 버전보다 약 5000유로 저렴하다. 물론 부가가치세(VAT) 22%가 포함된 가격이기에 절대적인 저가 전략은 아니지만, EV 수요가 주춤한 상황에서 ‘가성비’는 충분한 무기가 된다.
새로운 500 하이브리드는 구형 500과 판다에 쓰이던 1.0리터 3기통 마일드 하이브리드 엔진을 사용하며, 최고출력은 70마력이다. 변속기는 6단 수동만 제공되고 자동 옵션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 파워트레인은 전기차와 동일한 플랫폼에 탑재됐지만, 내연기관에 맞춰 전면부에 가로형 그릴이 추가된 것이 유일한 외관 차이다.
무엇보다 배터리를 제거한 만큼 차량 무게도 크게 줄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24kWh 배터리를 탑재한 500e는 약 1255kg, 42kWh 버전은 약 1340kg에 달한다. 가솔린 모델은 이보다 훨씬 가벼울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도심 주행에서의 경쾌함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번 내연기관 500의 재등장은 피아트의 생산거점 재정비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미라피오리 공장은 연간 10만 대 생산 능력을 갖췄지만 지난해 실제 생산량은 2만5000대에 불과했다. 스텔란티스는 공장 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전기차와 내연기관차를 같은 라인에서 병행 생산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략이 스텔란티스의 CO₂ 감축 계획에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은 2027년까지 제조사 전체 평균 배출량 기준을 강화하고 있으며, 가솔린 500이 판매 호조를 보일 경우 평균 CO₂ 수치가 상승할 우려가 있다. 이에 따라 스텔란티스는 전기차 판매를 더욱 확대해 이를 상쇄해야 한다.
한편, 피아트의 고성능 서브 브랜드인 아바스(Abarth)는 내연기관과 작별을 고하고 전동화로 전환 중이다. 고배기량 차량에 대한 유럽의 세금 부담을 이유로 들었으며, 가솔린 500 기반의 고성능 모델은 등장하지 않을 전망이다. 대신 아바스 배지를 단 500e와 크로스오버 600e가 고성능 전기차 라인업을 책임지게 된다.
전기차의 한계와 소비자의 실용성 니즈 사이에서, 피아트는 ‘양손잡이 전략’으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작지만 현실적인 500의 부활이, 유럽 소형차 시장에 어떤 반향을 불러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