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을 보내고 2026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스텔란티스코리아가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10일간 장기 시승차로 제공했다. 단발성 시승기로는 이 차가 가진 무게와 결을 온전히 담기 어렵다고 판단해, 이번 기획은 ‘옛 기록’의 문체를 빌려 여정을 남기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하루하루의 감각을 ‘실록’처럼 떠올려본다. 편집자주
강철마의 외양을 세밀히 살피니 이는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프 가문이 수십 년간 쌓아온 통치 철학이 서려 있음이라. 전면의 일곱 관문은 크롬의 광채를 입어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공기는 거대한 엔진의 숨결이 되어 이 거구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좌우로 길게 뻗은 LED 전조등은 낮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안광(眼光)처럼 형형하여, 길 위에서 마주하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길을 터주게 만드는 묘한 위압감을 풍긴다.
측면으로 넘어가니 수평으로 곧게 뻗은 캐릭터 라인이 인상적이다. 이는 마치 대륙의 지평선을 차체에 옮겨놓은 듯하여, 멈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기개가 느껴진다. 차체 하단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21인치의 거대한 철륜은 그 섬세한 가공이 보석과 같아, 험로를 달리는 투박한 말이라는 편견을 단번에 깨뜨린다.
내실로 들어서면 그 반전은 더욱 극명해진다. 대시보드를 가로지르는 리얼 우드 트림은 마치 고택의 대들보처럼 든든하고, 손끝이 닿는 곳마다 배치된 팔레르모 가죽은 비단보다 부드러우면서도 그 속에 강한 탄성을 품고 있다. 센터패시아의 다이얼 식 변속기는 정교하게 깎아낸 금속의 질감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이를 돌릴 때마다 전해지는 묵직한 저항감은 운전자로 하여금 이 거대한 기함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첫 주행의 감각 또한 비범하다. 가속 페달에 발을 얹으니 육중한 몸체가 미끄러지듯 나아가는데, 그 움직임이 흡사 깊은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것과 같다. 노면의 잔진동은 서스펜션이라는 여과기를 거치며 부드러운 유영으로 변모하고, 높게 자리 잡은 운전석 덕분에 천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야가 확보되니 심리적 여유는 절로 따라온다.
첫날의 도정은 이렇듯 짧은 마주함이었으나, 그랜드 체로키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를 실감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화려한 수트 아래 강인한 근육을 숨긴 이 기함과 함께 내일은 또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붓을 놓으며 1일차의 기록을 마친다.
어제부터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이내 동풍을 타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을사년의 겨울비는 차갑고도 매서워 대지를 얼어붙게 할 기세였으나, 강철마 그랜드 체로키의 등 위에 올라앉은 이에게는 그저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조각일 뿐이었다.
먼저 놀라운 것은 그 정적(靜寂)이다. 빗방울이 차체를 타격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음에도, 실내는 마치 깊은 산속의 암자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이중으로 겹쳐진 두꺼운 유리벽과 차체 곳곳에 덧대어진 방음재들이 외부의 소란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음이라. 와이퍼가 전면 유리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조차 부드러운 붓질처럼 소리가 없으니, 운전자는 오로지 전방의 시야와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 고요한 공간의 정점에 점을 찍는 것은 매킨토시(McIntosh)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이다. 비 오는 날의 우울함을 달래주는 선율이 19개의 스피커를 통해 쏟아지는데, 그 음색이 어찌나 맑고 깊은지 마치 연주자가 조수석에 앉아 현을 뜯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빗소리는 배경 음악이 되고, 음악은 빗소리를 품어 안으니 도로 위의 고단함은 어느덧 풍류로 변모한다.
빗길 주행의 안정감 또한 기특하다. 노면이 젖어 미끄러움이 가중되었음에도 사륜구동의 구동력 배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지면을 움켜쥔다. 웅덩이를 지날 때 발생하는 거친 저항 또한 묵직한 하체가 짓누르며 나아가니, 운전자의 손바닥에는 불안함 대신 단단한 신뢰가 전해진다. 파노라마 선루프 위로 맺혀 흐르는 빗방울을 보며 고속의 행군을 이어가다 보니, 이 거구의 기함이 단순히 이동의 수단이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는 완벽한 요새임을 실감하게 된다.
수중(水中)의 도정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그 위용에 다시금 감탄하며, 빗길을 뚫고 무사히 거점으로 복귀하였다. 비는 그칠 줄 모르나, 내일은 이 강철마의 머릿속에 담긴 신비로운 기술(IT)들을 파헤쳐 보리라 다짐하며 2일차의 붓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