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 인프라 부족과 보조금 축소, 그리고 가계 예산의 압박까지. 한때 장밋빛 미래로만 여겨졌던 전기차(EV) 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 자동차 제조사들이 '현실 판독'에 나섰다. 특히 2026년형 모델 체인지를 앞두고 북미 시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무기한 연기되는 차들이 늘고 있다. 이 중에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익숙한 모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관심이 쏠린다.
"럭셔리 세단의 자존심" 제네시스 G80 전동화 모델, 미국서 단종
한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는 제네시스 G80 전동화 모델(Electrified G80)이 미국 시장에서 2025년형을 끝으로 작별을 고한다. 정숙성과 고급스러운 실내로 호평받았지만, 테슬라와 독일 브랜드가 장악한 미국 시장에서 연간 판매량이 수백 대 수준에 그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전량 한국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구조 탓에 관세 부담이 컸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보조금 혜택에서도 제외된 것이 결정타였다. 다만 국내에서는 최근 휠베이스를 늘린 부분변경 모델이 출시되는 등 여전히 주력 라인업으로 자리 잡고 있어, 미국 시장에서의 철수는 '선택과 집중'을 위한 전략적 후퇴로 풀이된다.
"강남 싼타페의 전기차 버전?" 포르쉐 'K1' 출시 연기
카이엔보다 큰 체급으로 기대를 모았던 포르쉐의 차세대 플래그십 7인승 전기 SUV(코드명 K1)도 일정이 꼬였다. 당초 2026년 공개 예정이었으나, 포르쉐가 전기차 전환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출시가 뒤로 밀렸다. 포르쉐는 K1의 전기차 버전 이전에 내연기관이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모델을 먼저 선보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초급속 충전이 가능한 900V 아키텍처를 탑재한 '꿈의 전기차'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이다.
"국내 출시만 기다렸는데..." 폭스바겐 ID. Buzz의 불투명한 미래
과거 마이크로버스의 향수를 자극하며 국내 캠핑족들 사이에서 출시 요청이 쇄도했던 폭스바겐 ID. Buzz 역시 상황이 좋지 않다. 미국 출시 1년 만에 2026년형 생산 중단 소식이 들려왔다. 완전히 단종되는 것은 아니지만, 재고 소진을 위해 당분간 생산을 멈추기로 한 것이다. 한국 출시 설이 꾸준히 돌았지만, 현재 글로벌 수요 둔화와 가격 경쟁력 문제로 인해 국내 도입은 더욱 안갯속으로 빠지게 됐다.
"픽업은 역시 엔진이 있어야" 포드 F-150 라이트닝의 굴욕
미국 시장의 아이콘이자 국내 직수입 시장에서도 관심이 높았던 포드 F-150 라이트닝은 출시 3년여 만에 생산 중단이라는 수모를 겪게 됐다. 소비자들은 순수 전기 픽업의 짧은 주행거리와 견인 시 급격히 떨어지는 배터리 효율에 실망했다. 포드는 결국 순수 EV 대신 가솔린 엔진을 발전기로 사용하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로 방향을 틀어 2027년 재도전할 계획이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과감한 정리: EQB와 EQE·EQS
벤츠 역시 전동화 전략을 전면 수정 중이다. 엔트리급 전기 SUV인 EQB는 북미 시장에서 2025년형을 끝으로 퇴출당하며, 그 자리는 내년 출시될 신형 CLA 전기차가 대신한다. 논란의 '비누 모양' 디자인으로 호불호가 갈렸던 상위 모델 EQE와 EQS(세단 및 SUV) 역시 미국 내 주문이 일시 중단되는 등 생산 조절에 들어갔다. 국내에서도 벤츠 전기차에 대한 시선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본사의 행보는 국내 라인업 재편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