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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열전] 신(神)들의 전쟁: 롤스로이스 vs. 마이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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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열전] 신(神)들의 전쟁: 롤스로이스 vs. 마이바흐

"예술 경지에 오른 엔지니어링 vs. 기술 정점을 찍은 럭셔리"
가난한 제분업자와 귀족의 악수부터 100년 라이벌 역사까지

육동윤 기자

기사입력 : 2025-11-27 20:05

롤스로이스 팬텀 사진=롤스로이스이미지 확대보기
롤스로이스 팬텀 사진=롤스로이스
자동차라는 기계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우리는 그곳을 ‘하이엔드 럭셔리(High-end Luxury)’라 부른다. 부와 권력, 그리고 성공의 상징이 된 이 영역을 양분하는 두 거인이 있다. 바로 영국의 자존심 ‘롤스로이스(Rolls-Royce)’와 독일 기술의 정수 ‘메르세데스-마이바흐(Mercedes-Maybach)’다.

하나는 태생부터 귀족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탄생한 ‘움직이는 예술품’이고, 다른 하나는 엔지니어링의 한계를 돌파하며 탄생한 ‘기술의 결정체’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두 브랜드의 경쟁은 단순한 시장 점유율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진정한 럭셔리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 가깝다.

태동(Origins): ‘완벽주의’와 ‘천재 설계자’의 탄생

1937 팬텀 사진=롤스로이스이미지 확대보기
1937 팬텀 사진=롤스로이스

롤스로이스: 1904년, 맨체스터의 운명적 만남 롤스로이스의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가난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신문 배달을 하며 독학으로 전기를 배운 입지전적인 엔지니어 헨리 로이스(Henry Royce).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부유한 귀족이자 자동차광이었던 찰스 롤스(Charles Rolls).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은 1904년 5월, 영국 맨체스터의 미들랜드 호텔에서 마주 앉았다. 로이스가 직접 만든 차의 정숙성과 기계적 완성도에 충격을 받은 롤스는 그 자리에서 외쳤다. “내가 본 차 중 단연 최고다. 내 이름을 걸고 당신의 차를 팔겠다.”

두 사람의 이름이 합쳐진 ‘롤스로이스’는 설립 초기부터 타협 없는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이들의 걸작 ‘실버 고스트(Silver Ghost)’는 1907년, 당시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2만4000km 무고장 주행 기록을 세우며 “세계 최고의 차(The Best Car in the World)”라는 칭호를 얻었다. 롤스로이스의 상징인 ‘환희의 여신상(Spirit of Ecstasy)’에는 영국의 귀족 몬태규 남작과 그의 비서 엘리노어 손턴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어, 브랜드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클래스 사진=메르세데스-마이바흐이미지 확대보기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클래스 사진=메르세데스-마이바흐

마이바흐: 하늘을 지배하던 ‘체펠린’의 심장 비슷한 시기 독일에서는 ‘설계의 왕(King of Designers)’이라 불리던 천재 엔지니어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가 역사를 쓰고 있었다. 그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전신인 다임러 모터스에서 고틀립 다임러와 함께 최초의 메르세데스 자동차를 개발한 창업 공신이었다.

하지만 경영진과의 불화로 회사를 떠난 그는 아들 카를 마이바흐와 함께 독자적인 엔진 회사를 설립한다. 그들의 기술력은 지상이 아닌 하늘에서 먼저 빛을 발했다. 당시 하늘의 제왕이었던 거대 비행선 ‘체펠린(Zeppelin)’의 심장이 바로 마이바흐의 V12 엔진이었다.

하늘을 날던 정숙하고 강력한 엔진 기술은 1921년, 지상으로 내려와 첫 양산차 ‘마이바흐 W3’를 탄생시켰다. 당시 마이바흐는 “기어가 변속되는 것을 오직 타코미터 바늘의 움직임으로만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을 만큼, 독일 엔지니어링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마이바흐 62 사진=마이바흐 박물관이미지 확대보기
마이바흐 62 사진=마이바흐 박물관

암흑기와 전쟁(The Dark Age & War): 엇갈린 운명

마이바흐의 소멸과 60년의 침묵 2차 세계대전은 두 브랜드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마이바흐는 전쟁 기간 독일군 전차 엔진을 생산했고, 전쟁이 끝난 후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마이바흐라는 이름은 벤츠 박물관 한편에 전시된 유물이 되어 무려 60년간 깊은 잠에 빠졌다.

롤스로이스의 혼란, 그리고 ‘상표권 전쟁’ 롤스로이스 역시 순탄치 않았다. 항공기 엔진 사업의 실패로 1971년 국유화되는 수모를 겪었고, 이후 자동차 부문이 분리 매각되는 과정을 거쳤다. 1990년대 후반, 롤스로이스 매각 입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폭스바겐 그룹과 BMW 그룹이 롤스로이스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머니 게임을 벌인 것이다.

결과는 기묘했다. 공장과 벤틀리 브랜드는 폭스바겐이 가져갔지만, 결정적으로 ‘롤스로이스’라는 브랜드 명과 로고 사용권은 BMW가 획득했다. 이 사건은 훗날 럭셔리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뒤흔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부활(Revival): 실패에서 배운 벤츠, 독주하는 롤스로이스

마이바흐의 뼈아픈 실패 (2002~2013) BMW에 롤스로이스를 뺏긴 메르세데스-벤츠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2002년, 잠들어 있던 마이바흐 브랜드를 60년 만에 부활시킨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집약한 ‘마이바흐 57’과 ‘62’ 모델이 세상에 나왔다. 이건희 삼성 회장, 배우 배용준 등 세계적 명사들이 이 차를 선택하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S-클래스와 너무 닮은 디자인, 차별화되지 않은 브랜드 스토리,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가격. 대중은 “그냥 더 크고 비싼 벤츠”라고 인식했다. 판매 부진에 시달리던 마이바흐는 결국 2013년, 다시 한번 단종의 아픔을 겪는다.

롤스로이스의 완벽한 승리 반면 BMW의 지원을 받은 롤스로이스는 2003년, 브랜드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현대적으로 해석한 ‘팬텀(Phantom)’을 내놓으며 시장을 평정했다. 파르테논 신전을 형상화한 거대한 그릴, 마차처럼 뒤로 열리는 ‘코치 도어’, 휠이 돌아가도 'RR' 로고는 똑바로 서 있는 ‘스피닝 휠 캡’ 등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롤스로이스는 단순한 차가 아닌 ‘성공의 트로피’가 됐다.

현재(Present): 독자 노선 vs. 서브 브랜드의 성공 방정식

실패를 맛본 벤츠는 전략을 수정했다. 마이바흐를 독립 브랜드가 아닌, 메르세데스-벤츠의 최상위 서브 브랜드 ‘메르세데스-마이바흐(Mercedes-Maybach)’로 재편한 것이다. 신의 한 수였다.

메르세데스-마이바흐: "S-클래스를 넘어선 S-클래스" 새로운 마이바흐는 S-클래스의 검증된 플랫폼과 최첨단 기술 위에 마이바흐만의 럭셔리 터치를 입혔다.

장인이 일주일간 수작업으로 칠하는 투톤 컬러는 마이바흐의 시그니처가 됐다. 뒷좌석 승객을 위해 문을 자동으로 닫아주는 제스처 컨트롤, 은도금 샴페인 잔, 4D 부메스터 사운드 시스템 등은 ‘기술적 호사’의 끝을 보여준다.

성공 요인은 롤스로이스보다 상대적으로 접근 가능한 가격대(3억~5억 원대)이면서도, 벤츠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실용적 럭셔리’ 전략이 적중했다.

롤스로이스: "타협하지 않는 절대 존엄" 롤스로이스는 여전히 ‘고고한 황제’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대량 생산 플랫폼을 거부하고 롤스로이스 전용 알루미늄 플랫폼인 ‘럭셔리 아키텍처(Architecture of Luxury)’만을 사용한다.

비스포크(Bespoke): 고객이 원하면 내장재 색상은 물론, 대시보드에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나 보석을 넣는 ‘갤러리’ 옵션까지 제공한다. 세상에 똑같은 롤스로이스는 없다.

‘매직 카펫 라이드’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100kg에 달하는 흡음재를 사용하고, 카메라가 전방 노면을 읽어 서스펜션을 조절하는 기술을 통해 구름 위를 떠가는 듯한 승차감을 구현한다.

미래(The Future): 전동화 시대의 럭셔리

전기차(EV) 시대의 도래는 두 브랜드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내연기관 엔진의 소음과 진동을 없애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 온 이들에게, 태생적으로 조용한 전기 모터는 완벽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 ‘스펙터(Spectre)’는 롤스로이스 최초의 순수 전기차다. 그들은 “전기차라서 만든 것이 아니라, 롤스로이스를 더 롤스로이스답게 만들기 위해 전기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V12 엔진의 회전 질감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력한 토크와 적막에 가까운 정숙성으로 ‘전동화 럭셔리’의 기준을 세웠다.

마이바흐는 SUV 트렌드와 전동화를 결합했다. 벤츠의 전기차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뒷좌석에서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와 자율주행 기술에 집중했다. 이는 전통적인 쇼퍼 드리븐을 넘어, 디지털 친화적인 신흥 부호(New Money)들을 공략하겠다는 의지다. 대표적인 모델이 메르세데스-마이바흐 ‘EQS SUV’다.

두 브랜드의 차이는 결국 철학의 차이다. 롤스로이스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고전적 가치를 숭배한다. 장인이 붓 하나로 그리는 코치라인(Coachline)처럼, 인간의 손길이 닿은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판다. 이것은 ‘군림하는 럭셔리’다.

마이바흐는 시대의 최전선에 선 기술적 진보를 찬양한다. 가장 안락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스마트한 이동 경험을 제공한다. 이것은 ‘진보하는 럭셔리’다.

2025년, 두 왕관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이들이 펼치는 치열한 경쟁이야말로 자동차 역사를 가장 화려하게 수놓는 원동력임은 분명하다.


육동윤 글로벌모빌리티 기자 ydy332@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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