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토요타 창업자 가문의 장남 도요다 에이지는 한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사명은 단순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라.” 이 한마디로 시작된 것이 렉서스(Lexus)의 출발점이었다. 프로젝트 명칭은 ‘F1(Flagship One)’, 최고의 플래그십 세단을 목표로 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5년 뒤, 1989년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인 LS 400은 당시 시장 판도를 뒤흔들었다. 조용한 주행감, 정밀한 조립 품질, 뛰어난 내구성을 바탕으로 “일본식 럭셔리”라는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렉서스는 데뷔와 동시에 북미 시장에서 메르세데스-벤츠, BMW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1990년대, 렉서스는 북미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세단 중심의 라인업에서 벗어나 SC 쿠페, GX 및 LX SUV, 그리고 1998년 출시한 RX 300을 통해 고급 SUV 시장까지 점령했다. 특히 RX는 크로스오버 SUV의 개념을 최초로 상용화하며 렉서스를 ‘프리미엄 SUV 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결정적 모델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 렉서스는 기술력과 감성 모두를 강화했다. 대표적인 변화가 하이브리드 시스템 도입과 ‘F’ 퍼포먼스 라인의 출범이다. 2007년 선보인 IS F는 BMW M3와 메르세데스-AMG C63을 겨냥한 고성능 세단으로, 렉서스가 단순한 럭셔리 브랜드를 넘어 퍼포먼스 브랜드로 도약하고 있음을 상징했다. 이어 2010년 출시된 LFA 슈퍼카는 브랜드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모델로 꼽힌다. 4.8리터 V10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560마력과 9000rpm의 배기음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된다.
전동화의 선두로
렉서스는 2005년 RX 400h를 통해 세계 최초로 고급 SUV 하이브리드를 상용화하며 전동화 시장을 선도했다. 이후 ES, LS, NX, UX 등 대부분의 주요 라인업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적용하며 ‘고급 하이브리드 = 렉서스’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전기차 전환을 본격화했다. 2023년 브랜드 창립 35주년을 맞아 공개한 전동화 콘셉트카 LF-ZC와 LF-ZL은 향후 렉서스가 지향하는 디자인과 기술 방향성을 집약한 결과물이다. 또한, 2024년 글로벌 출시한 RZ 전기 SUV는 배터리 최적화와 주행거리 개선을 통해 프리미엄 전기 SUV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렉서스다운 정숙성과 주행 감각을 전기차에 담는다’는 전략이 핵심이다.
렉서스는 전동화 흐름 속에서도 고성능 브랜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2027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인 렉서스 LFR은 전설적인 LFA의 후속작으로, 트윈터보 V8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통해 800마력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뉘르부르크링과 캘리포니아에서 테스트 중인 이 모델은, 페라리 296GTB와 경쟁할 수 있는 일본 프리미엄 브랜드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프리미엄 시장에서의 현재 입지
렉서스는 오늘날 북미 시장에서 고급차 브랜드 3위권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2024년 북미 판매량은 약 33만 대로 전년 대비 8% 성장했으며, 특히 RX·NX SUV 라인이 판매를 견인했다. 북미 시장에서는 BMW, 메르세데스-벤츠와 삼파전을 벌이며, ‘합리적 프리미엄’ 이미지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유럽 시장에서는 여전히 도전자의 위치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독일 프리미엄 3사의 점유율이 높아서, 렉서스는 하이브리드 SUV와 정숙성 중심의 세단을 전면에 내세우며 차별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일본 시장에서도 독자 브랜드로 완전히 자리잡은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하이브리드 중심의 라인업으로 고급차 시장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넓히는 중이다.
렉서스는 최근 ‘럭셔리’의 정의를 단순히 소재와 편의장비가 아니라 고객 경험과 지속 가능성으로 확장하고 있다. 전동화 라인업 확대를 위해 2025년까지 글로벌 판매 차량의 절반 이상을 하이브리드 또는 전기차로 전환하는 전략을 세웠다. RZ 전기 SUV, 차세대 ES 하이브리드, 그리고 LF-ZC 기반의 신형 EV 세단이 대표적이다. OTA(Over-The-Air) 업데이트 강화에 대한 계획도 있다. 최신 렉서스 차량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기능 진화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고객들이 차량을 오래 사용해도 최신 기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리고 ‘렉서스 럭셔리 라운지(Lexus Luxury Lounge)’와 같은 프리미엄 오너 전용 프로그램을 통해 단순한 차량 소유를 넘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럭셔리의 재정의, ‘조용한 혁신’
렉서스가 추구하는 럭셔리의 본질은 과시적 디자인이나 극단적 성능 경쟁에 있지 않다. 대신 정숙성, 장인정신, 균형 잡힌 감성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확립해왔다. 특히, 일본 전통공예에서 영감을 받은 키리코(Kiriko) 글래스 패턴과 오리가미(Origami) 방식 시트 스티칭 같은 디테일은 “시간과 노력으로 완성된 고급스러움”이라는 렉서스만의 해석을 보여준다.
토요타의 ‘카이젠(Kaizen)’ 철학을 기반으로 매년 작은 개선을 거듭하는 것도 렉서스의 차별점이다. 급격한 혁신보다 신뢰성 중심의 진화를 선호하는 고객층에게 이 방식은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렉서스는 2035년을 목표로 완전 전동화 브랜드로의 전환을 공식 선언했다. 단순히 파워트레인 변화에 그치지 않고, 렉서스 특유의 주행 감각을 EV 시대에도 구현하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LF-ZC 콘셉트에서 미리 공개된 e-TNGA 기반 전기차 플랫폼, 스티어 바이 와이어(Steer-by-Wire)와 주행 음향 설계 등 감각적 요소를 중시하는 감성 주행 기술을 지향한다. 그리고 800마력 이상을 목표로 하는 LFR 프로젝트는, ‘전동화와 고성능은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상징한다.
전통 위에 세운 새로운 비전
렉서스는 4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The Relentless Pursuit of Perfection)”라는 철학을 유지해왔다. 처음 LS 400으로 럭셔리 세단 시장을 재편했던 브랜드는 이제 전동화 시대를 맞아 또 다른 변화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있다. 정숙함, 세밀한 품질, 그리고 고객 중심의 사고가 바로 렉서스가 존재하는 이유다.
다가올 10년, 렉서스는 ‘일본식 럭셔리’라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전동화와 기술 혁신으로 또 한 번 시장의 기준을 새롭게 쓸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