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모빌리티

글로벌모빌리티

[insight] “어쩌다 붙인 숫자 ‘1’이 혁신의 아이콘이 되다”...전설이 된 포르쉐의 작명법

메뉴
0 공유

뉴스

[insight] “어쩌다 붙인 숫자 ‘1’이 혁신의 아이콘이 되다”...전설이 된 포르쉐의 작명법

육동윤 기자

기사입력 : 2025-07-09 10:30

포르쉐 911 카레라 GTS 사진=포르쉐이미지 확대보기
포르쉐 911 카레라 GTS 사진=포르쉐
“우리는 901을 911로 바꾸었고, 그 이름은 곧 세기의 아이콘이 되었다.”

포르쉐 내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 문장은 단순한 숫자 변경이 어떻게 브랜드 정체성을 바꾸고, 하나의 전설이 되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애초에 911이라는 이름은 계획된 것도, 전략적으로 계산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법적 제약을 피하기 위한 대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우연한 선택’은 포르쉐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결정 중 하나로 남게 된다.

1963년, 포르쉐는 356의 뒤를 이을 새로운 스포츠카를 공개한다. 프로젝트 코드명은 ‘901’. 6기통 수평대향 엔진을 품고, 성능과 디자인에서 진일보한 모델이었다. 이 이름 그대로 양산에 들어가려던 찰나, 예상치 못한 제동이 걸린다. 프랑스 자동차 제조사 푸조가 ‘가운데 숫자 0이 들어간 세 자리 숫자’를 자사의 고유 네이밍 체계로 유럽 전역에 특허 등록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푸조는 즉각 항의했고, 포르쉐는 고민에 빠졌다.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변경으로 위기를 넘길 것인가. 포르쉐가 택한 선택지는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가운데 숫자 0을 1로 바꿔, 모델명을 ‘911’로 수정한 것이다. 수치상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이 숫자는 곧 브랜드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 ‘911’은 단순한 모델명이 아니다. 스포츠카의 정수이자, 포르쉐라는 이름 그 자체다.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911은 하나의 종교”라는 표현이 통용될 정도다. 람보르기니가 과시적이고, 페라리가 열정적이라면, 포르쉐 911은 철학적이고 고집스럽다. 실용성과 퍼포먼스, 전통과 진화를 모두 아우르는 이 독보적인 모델은 ‘어쩌다 붙은 숫자’가 브랜드 정신 그 자체로 성장한 보기 드문 사례다.

포르쉐의 작명법은 전통적으로 숫자 기반을 유지해왔다. 브랜드 첫 양산차였던 356은 단순히 개발 순서에서 비롯된 이름이었고, 이후 550, 718 등의 숫자들도 프로젝트 코드에서 유래했다.
포르쉐 작명법 인포그래픽 출처=AI 생성이미지 확대보기
포르쉐 작명법 인포그래픽 출처=AI 생성

718은 지금도 박스터와 케이맨을 아우르는 미드십 스포츠 라인업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숫자 네이밍은 단지 분류 목적이 아니라, 브랜드의 계보를 이어가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작명 방식도 점차 다양해졌다. SUV 모델인 카이엔, 콤팩트 SUV 마칸, 전기 스포츠 세단 타이칸처럼 알파벳 기반의 이름도 쓰이고 있다. 이 이름들에는 설화, 문학, 전통 무술 등의 뿌리에서 따온 독특한 어원이 숨어 있다. 예컨대 ‘타이칸(Taycan)’은 터키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생기 넘치는 젊은 말’이라는 뜻을 갖는다. 포르쉐는 이를 통해 전기차 시대에도 여전히 브랜드의 ‘스포츠카 DNA’가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편, 포르쉐 내부에서 성능을 나타내는 체계도 매우 논리적이다. GT3, GT4는 서킷용 고성능 라인업을 의미하고, ‘GTS’는 퍼포먼스와 실용성을 아우르는 모델에, ‘터보 S’는 최상위 플래그십에 붙는다. 전기차인 타이칸에도 ‘터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터보차저가 없어도, 터보가 의미하는 퍼포먼스의 감성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결국 숫자 ‘911’은 단지 법적 타협에서 시작됐지만, 이후 60년 동안 어떤 브랜드도 따라올 수 없는 유산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푸조의 항의가 없었다면, 오늘날 ‘911’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숫자 하나의 변화가 브랜드 운명을 바꾸는 순간. 그 상징성은 단순한 모델명을 넘어, 자동차라는 기계에 담긴 인간의 열정과 집념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1’이라는 작지만 강한 숫자가 자리잡고 있다.


육동윤 글로벌모빌리티 기자 ydy332@g-enews.com
<저작권자 © 글로벌모빌리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