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전기 자동차(EV) 주력 모델인 아이오닉 5와 코나 일렉트릭(EV)의 생산을 또다시 중단하며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 현상이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오는 27일부터 30일까지 울산 1공장 2라인의 가동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해당 라인은 현대차의 핵심 전기차 모델인 두 차량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
이번 생산 중단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고금리 지속, 그리고 전기차 구매 보조금 축소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수요 증가세가 꺾이면서 재고가 쌓이고 판매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는 추세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대차 역시 이달 초 아이오닉 5에 대해 최대 600만 원의 파격적인 할인 혜택을 제시하는 등 판매 활성화를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시장의 반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동률 유지를 위해 생산 라인의 속도를 늦추는 ‘공피치’ 방식으로 간신히 버텨왔으나, 이마저도 한계에 봉착하면서 결국 생산량 조절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차는 이미 올해 2월과 4월에도 동일한 이유로 해당 라인의 가동을 일시 중단한 바 있어, 전기차 시장의 침체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글로벌 EV ‘빙하기’ 오나.. 곳곳 감산·폐쇄 칼바람
현대차의 사례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위기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때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며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이끌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전기차 시장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냉각되는 분위기다.
유럽 시장에서는 이미 전기차 수요 둔화의 여파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 4위 자동차 제조업체인 스텔란티스는 지난해 말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의 전기차 공장 가동을 일시 중단한 바 있다. 스텔란티스 측은 유럽 시장의 전기차 판매 부진과 북미 시장의 수요 감소 등을 이유로 들었다. 또한, 영국 정부의 전기차 판매 목표에 반발하며 영국 루턴의 밴 공장 폐쇄를 결정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전기 버스 제조업체인 라이언 일렉트릭은 지난해 말 경영난 악화로 미국 일리노이주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대규모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이 회사는 공급망 문제와 배터리 공급업체와의 분쟁 등으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려 온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시장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때 ‘제2의 테슬라’를 꿈꿨던 미국의 전기차 스타트업 피스커는 지난 2월 결국 파산 보호를 신청했으며, 중국 부동산 재벌 헝다(에버그란데)의 전기차 계열사 두 곳도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이는 중국 내 전기차 시장의 경쟁 심화와 정부 보조금 축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전통적인 자동차 강국인 독일의 폭스바겐 역시 지난해 말 전기차 시장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비용 절감을 위해 대규모 인력 감축을 발표했으며, 일부 공장의 폐쇄까지 검토하는 등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폭스바겐은 전기차 전환에 대한 투자 부담과 예상보다 더딘 시장 성장세 사이에서 고심하는 모습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 제조업체인 닛산마저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와 경영난 심화로 인해 대대적인 생산 구조조정에 나섰다. 닛산은 최근 일본 내 2개 공장을 포함하여 멕시코, 인도,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총 7개의 생산 공장을 폐쇄할 예정이라고 밝혀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닛산이 전기차 시장의 성장 둔화와 경쟁 심화 속에서 수익성 확보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닛산의 대규모 공장 폐쇄 결정은 전기차 시장의 냉각 기류가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닌, 산업 전반의 위협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북미 시장 역시 전기차 수요 둔화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제너럴 모터스(GM)는 지난 4월, 캐나다 온타리오 조립 공장에서 생산하는 쉐보레 브라이트드롭 전기 상용 밴의 생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GM과 해당 공장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유니포(Unifor)에 따르면, 이번 생산 중단으로 인해 공장 소속 1200명의 근로자가 일시 해고됐다.
GM 측은 이번 생산 중단이 최근 부과된 자동차 관세와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재고 조절과 현재 수요에 맞춘 생산 일정 조정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노조 측은 해고가 4월 14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노동자들은 5월부터 제한적인 생산을 위해 복귀할 예정이지만, 2025년 10월까지 생산이 전면 중단될 것이라고 밝혔다. GM은 이 가동 중단 기간 동안 2026년형 브라이트드롭 밴 생산을 위한 공장 설비 재정비를 진행할 계획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2025년 10월 생산 재개 후에도 공장이 단일 교대제로 운영될 예정이며, 이로 인해 약 500명의 근로자가 무기한 해고될 것이라는 노조의 전망이다. 이는 GM 역시 전기 상용차 시장의 성장 둔화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중국 시장 경쟁 격화.. 혼다, 전기차 생산 확대 위해 공장 폐쇄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일본의 혼다자동차는 지난해 7월, 중국 시장에서 전기차 생산을 늘리기 위해 현지 합작 법인이 운영하는 공장 중 한 곳을 폐쇄하고 다른 공장의 자동차 생산을 중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중국 토종 브랜드들의 빠른 성장과 가격 경쟁력 우위 속에서 혼다가 전기차 시장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혼다는 중국 국영 자동차 제조업체 광저우자동차그룹(GAC)과의 합작 법인을 통해 운영되는 공장을 폐쇄하고, 기존 내연기관차 생산 라인을 전기차 생산 라인으로 전환하는 등 생산 체제를 재편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중국 시장에서 전기차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현대차 아이오닉 5·코나 EV 생산 중단.. 글로벌 전기차 시장 ‘빙하기’
이미지 확대보기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의 동풍 혼다 신에너지차(NEV) 생산 공장. 사진=혼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 우려.. 전기차 시장 불확실성 증폭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으로 글로벌 무역 환경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인 리나마 코퍼레이션의 린다 하센프라츠 회장은 과거 트럼프 행정부의 25% 관세 부과로 인해 북미 자동차 공장들이 즉각적인 생산 중단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처럼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심지어 일부 기업들은 생산 중단이나 공장 폐쇄라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하는 상황은 전기차 시장의 ‘캐즘(Chasm)’, 즉 일시적인 수요 정체를 넘어 장기적인 침체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친환경차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만, 단기적인 수요 예측 실패와 과잉 투자, 그리고 예상보다 더딘 소비자들의 구매 전환 속도는 자동차 업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금리, 경기 침체 우려, 충전 인프라 부족,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등이 전기차 구매를 망설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는 곧바로 판매 부진과 생산 차질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