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르노 아르카나 E-테크 하이브리드 에스프리트 알핀 트림 모델 (AI 배경 수정 이미지) 사진=육동윤 글로벌모빌리티 기자
연말이 되면 늘 비슷한 풍경이 반복된다. 화려한 조명, 크리스마스 캐럴, 그리고 유난히 비싸 보이는 것들. 자동차 시장도 다르지 않다. 연말 신차 뉴스의 대부분은 고가의 전기차, 프리미엄 브랜드, 혹은 1억 원을 훌쩍 넘는 모델들이다. 그 사이에서 ‘국민차’라는 단어는 어느새 계절이 지난 캐럴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만난 르노코리아의 르노 아르카나는 묘하게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차였다. 과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선물 같은 느낌 말이다.
아르카나는 첫인상부터 이중적이다. 르노 엠블럼, 쿠페형 SUV 실루엣, 프랑스 감성 디자인. 얼핏 보면 수입차다. 하지만 이 차는 부산 공장에서 생산되는 국산차다. 동시에 르노 프랑스, 더 정확히는 유럽 시장의 품질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만든 모델이다. 국산차의 현실적인 접근성과 유럽차의 기준이 한 차에 공존한다. 연말에 ‘믿고 고를 수 있는 선택지’라는 점에서 이 조합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시승차는 무광의 짙은 회색, 이른바 새틴 그레이 계열(무광 그레이)이었다. 정확하게는 ‘새틴 어반 그레이’다. 겨울 햇빛 아래에서는 차콜처럼 묵직해 보이고, 흐린 날에는 은은한 회색으로 가라앉는다. 크리스마스 시즌 특유의 차분한 공기와 잘 어울린달까.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낸 차체 면과 만나면서, 차가 실제보다 더 낮고 날렵해 보인다. 눈길을 요란하게 끄는 대신, 조용히 세련된 인상을 남기는 타입이다.
아르카나의 진짜 매력은 E-Tech 하이브리드 시스템에서 나온다. 르노가 F1 기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하는 이 시스템은, 연말 도심 주행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막히는 길, 신호 대기, 반복되는 출발과 정지. 그 모든 상황에서 전기모터 위주의 부드러운 움직임과 정숙성은 체급 이상의 여유를 만들어낸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는 밤길에서 계기판을 보면, 연비는 어느새 18km/L를 훌쩍 넘는다. 이 차는 연료비를 아끼는 도구라기보다, 가벼워지는 연말 주머니 걱정을 덜어주는 수단인 거 같기도 하다.
차체 크기는 소형 SUV지만, 공간 활용은 연말 시즌에 특히 빛난다. 트렁크는 쿠페형 디자인을 떠올리면 의외로 넉넉하다. 장보기, 선물 상자, 여행용 캐리어까지도 큰 부담 없이 들어간다. 실내 역시 마찬가지다. 과시적인 연출은 없지만, 필요한 것들은 빠짐없이 갖췄다. 시트 통풍, 핸들 열선 같은 요소들은 겨울철 일상에서 체감 만족도를 확실히 끌어올린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하지 않은 합리적 풍요’ 같기도 하다.
[육기자의 으랏차차] 국민차의 재정의, 르노 아르카나…“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이미지 확대보기르노 아르카나 E-테크 하이브리드 에스프리트 알핀 트림 모델 인테리어 사진=육동윤 글로벌모빌리티 기자
이 정도면 가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카나는 요즘 쏟아지는 프리미엄 SUV들과 비교해도 체감 만족도가 크게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듯, 브랜드 네임보다 실제 쓰임을 중시하는 소비자라면 충분히 설득당할 만하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주행 감성이다. 차체는 전반적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제동과 코너링은 예상대로 정확하지만, 요철을 넘거나 다소 과격한 조작에서는 차가 통통 튄다는 인상이 있다. 묵직하게 눌러주는 독일 프리미엄 SUV의 감각을 기대하면 분명 결이 다르다. 다만 이는 성향의 문제에 가깝다.
오히려 이 특성은 도심 주행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핸들링은 가볍고 반응은 빠르다. 연말처럼 도로가 붐비는 시기, 긴장 없이 운전하기에는 훨씬 편하다. 여성 운전자나 장거리 주행이 잦은 이들에게도 부담이 적다. 아르카나는 스포츠 SUV가 아니라, 생활형 하이브리드 SUV라는 정체성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기자가 시승한 모델은 ‘에스프리트 알핀(Esprit Alpine)’ 트림이다. 2025년형 기준으로 E-Tech 하이브리드 라인업 중 최상위 트림으로, 가격은 약 3400만 원 수준이다. 기본 하이브리드 모델인 ‘테크노’(약 2850만 원), 중간 트림 ‘아이코닉’(약 3214만 원)과 비교하면 약 600만 원가량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 차이는 단순한 등급 차이로 보기 어렵다. 에스프리트 알핀에는 전용 외관 장식(새틴 그레이 블레이드 범퍼, 알핀 로고 엠블리셔), 다크 투톤 18인치 알로이 휠, 프리미엄 마이크로 화이버 시트, 블루 안전벨트 등 시각적·촉각적 만족도를 높이는 요소들이 기본으로 더해진다. 운전석 6웨이 전동 파워시트, 전용 스포츠 페달 등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쓴 흔적이 분명하다. 여기에 360° 어라운드 뷰 모니터, BOSE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등 고급 사양이 패키지로 묶이며, 연말에 ‘조금 더 좋은 선택’을 하고 싶어지는 특별한 이유를 만든다.
국민차는 싸기만 한 차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차도 아니다. 대다수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연말 같은 특별한 시기에도 부담 없이 함께할 수 있는 차다. 그런 의미에서 르노 아르카나는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아주 성실한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국민차다.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말, 이 계절에는 특히 과장이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