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되는 차를 보면 그 브랜드의 미래가 보인다.” 자동차 산업이 전동화의 큰 물줄기 속에서 방향을 튼 지금, 단종은 단순한 판매 부진이 아니라 브랜드 전략 수정의 결과물이다. 시장의 요구, 법규 변화, 생산 효율성, 그리고 무엇보다 전동화·디지털화에 대한 대응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2025년을 앞두고 단종이 예고된 수많은 모델 속에는 그 브랜드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택하려 하는지가 명확히 담겨 있다.
아우디: 익숙한 이름 지우고, 전동화 문 활짝
아우디는 A4와 A7의 단종을 예고했다. A4라는 이름은 살아있지만, 내연기관 모델은 A5로 대체된다. 전동화 시대를 위한 정비 차원에서 A4는 전기차 전용 모델로 거듭날 계획이다. 지금까지의 A4는 2.0리터 가솔린 터보를 품은 콤팩트 럭셔리 세단의 전형이었지만, 2025년형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A7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차는 A6가 등장한 이후 명확한 입지를 잃었다. 겹치는 부분도 있고 SUV 중심 수요 변화 때문이다. 이 두 모델의 퇴장은 곧 아우디의 전동화 전환이 본격화됐음을 의미한다. Q4 e-트론, Q6 e-트론, 그리고 향후 등장할 전기 세단 라인업이 이 빈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다.
BMW는 이번 단종 리스트에서 가장 많은 모델을 포함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건 X4다. 2014년 데뷔해 SUV 쿠페 시장을 열었다. 브랜드는 그 자리를 보다 작고 날렵한 X2로 넘긴다. 시장 트렌드 변화에 따른 명확한 선택이다. 8시리즈 역시 생산 종료가 확정됐다. 쿠페, 그란 쿠페, 컨버터블은 물론 고성능 M8도 함께 사라진다. 617마력 V8 터보를 얹은 M8은 화끈한 존재였지만, 전동화 시대에 걸맞지 않은 대배기량 머신이다.
그 외에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기반 고성능 SUV인 XM 역시 베이스 트림이 삭제되고 상위 모델인 XM 라벨만 남긴다. 판매 부진과 생산 효율화를 동시에 고려한 조치다. BMW는 현재 X7, X5 등 주요 SUV 라인업도 대거 재편 중이며, 미래형 전동화 모델인 ‘노이에 클라쎄’를 중심으로 체계를 다듬고 있다.
캐딜락: XT 시리즈의 전면 재정비
캐딜락은 XT4, XT5, XT6까지 SUV 주력 라인업 대부분을 정리 중이다. 가장 먼저 퇴장한 XT4는 쉐보레 볼트의 신형 생산을 위해 조립라인을 넘기며 조용히 막을 내렸다. XT6 역시 3열 SUV 시장에서의 존재감을 확보하지 못한 채 2025년 단종된다. 흥미로운 건 이들 모델이 모두 중국 시장에서는 여전히 판매된다는 사실이다. 미국 시장에서는 에스컬레이드, 리릭 등 고급 전기 SUV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포드는 2025년 이후 컴팩트 SUV ‘이스케이프(Escape)’의 판매를 중단한다. 다만 전면적인 단종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뉴욕, 오리건 등 배출가스 규제가 강한 6개 주에서만 이스케이프가 사라지고, 나머지 지역에선 판매가 계속된다. 미국 내 2024년 이스케이프 판매량은 14만 대를 넘겼으며, 포드 전체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린 모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선택적 단종을 택했다는 점은 포드가 시장별·규제별 맞춤 대응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렉서스는 브랜드 내 아이콘 중 하나였던 ‘RC’ 시리즈를 단종시킨다. RC는 10년 가까이 이어온 2도어 쿠페 라인업이지만, 최근 몇 년간 판매가 급감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성능 버전인 RC F도 함께 단종된다. 또한, 하이브리드 GT 모델인 LC500h 역시 단종 대상에 올랐다. LC 시리즈는 여전히 유지되지만, 향후엔 내연기관 V8 중심에서 전동화 혹은 다운사이징된 고성능 하이브리드 시스템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렉서스는 이미 RZ 등 순수전기차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으며, ‘전동화의 감성 유지’를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GLC 쿠페와 GLE 쿠페의 단종을 검토하고 있다. GLC, GLE는 각각 브랜드의 베스트셀러지만, 쿠페형 SUV는 상대적으로 판매량이 낮고 생산 복잡성만 높인다는 판단이다. 벤츠는 이미 2024년부터 라인업 간소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으며, E클래스 쿠페·카브리올레 통합 모델인 CLE의 등장도 같은 맥락이다. 전기차 EQ 라인업도 통합과 정리 수순에 들어간 만큼, 벤츠는 이제 진정한 ‘전기 럭셔리 브랜드’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볼보는 2026년을 전후로 미국 시장에서 S60, S90, 그리고 V60 폴스타 엔지니어드 등 3개 모델을 단종시킨다. 이 중 S90은 이미 미국 판매가 종료됐고, 차기 모델은 중국 전용으로만 생산된다. 미국과 유럽 주력 시장에서는 더이상 대형 세단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볼보는 2030년까지 내연기관 차량 완전 퇴출을 선언했으며, EX30, EX90 등 순수전기 SUV 라인업 확장을 본격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