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의 출발점에는 ‘코치빌더(Coachbuilder)’가 있었다. 완성차를 대량 생산하던 시대 이전, 자동차는 차체를 따로 제작하는 장인 공방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섀시 위에 고객 맞춤형 차체를 얹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쌓았고, 디자인과 기술력이 곧 브랜드의 정체성이 됐다. 작은 작업장에서 출발해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브랜드로 성장한 사례는 자동차 산업의 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규어, 모건, MG, 피닌파리나, 알피느는 모두 코치빌더 혹은 개조차 제작사에서 출발해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한 대표적 사례다. 이들의 성공은 단순한 기업 확장이 아니라, 장인정신과 브랜드 전략이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된 결과다.
재규어(Jaguar) 맞춤 차체에서 전기 럭셔리 브랜드로
영국 재규어의 시작은 1920년대 사이드카와 맞춤 차체 제작이었다. 스왈로우 사이드카 컴퍼니는 기존 자동차 섀시에 세련된 차체를 얹어 차별화를 꾀했고, 이 감각은 훗날 재규어 브랜드의 미학으로 이어졌다. 전쟁 이후 등장한 재규어 XK120(1948년형)은 최고 시속 193km를 기록하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양산차로 주목받았다. 유려한 보닛 라인과 강력한 직렬 6기통 엔진은 재규어를 단숨에 고성능 스포츠카 브랜드로 끌어올렸다. 이후 E-타입(1961년형)은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라는 평가를 받으며 디자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재규어는 현재 전기차 중심의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다. 2025년부터 전 차종을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리이매진(Reimagine)” 전략 아래, 첫 순수 전기 모델 ‘타입 00’를 출시할 계획이다. 이미 선보인 I-페이스(I-Pace)는 프리미엄 브랜드 중 발빠른 전기 SUV 시도로 주목받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빨리, 너무 멀리 시대를 앞서간 행보가 발목을 잡았다.
모건은 지금도 수작업 제작 방식을 고수하는 영국의 전통 브랜드다. 1909년 창립자 H.F.S. 모건이 제작한 모건 3-휠러(Three-Wheeler)는 가볍고 단순한 구조로 모터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삼륜차 기반의 이 모델은 초기 모건의 기술적 뿌리이자 브랜드 정체성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모건은 클래식한 외형의 4륜 스포츠카를 선보이며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았다.
최근 모건의 대표 전략 모델은 플러스 식스(Plus Six)다. BMW의 3.0리터 터보 엔진과 알루미늄 섀시를 적용해 성능과 안전성을 현대화했지만, 외형은 여전히 클래식한 로드스터 형태를 유지했다. 목재 프레임과 수작업 조립이라는 전통 공법도 그대로다. 대량 생산을 거부하고 장인정신을 브랜드 핵심 가치로 유지하는 전략은 모건을 독보적인 ‘헤리티지 스포츠카 브랜드’로 만든다.
MG는 영국 모리스 개러지의 개조차에서 출발했다. 창립자 세실 킴버는 기존 차량에 스포티한 차체와 튜닝을 더한 MG 14/28(1924년형)을 선보이며 브랜드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MG는 합리적인 가격의 스포츠카로 명성을 쌓았고, 2차대전 이후 등장한 MG TC는 미국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작고 경쾌한 로드스터는 전후 미국 스포츠카 붐을 촉발했고, MG를 글로벌 브랜드 반열에 올려놨다.
이후 경영난으로 사라졌던 MG는 중국 기업에 인수된 뒤 전기차 브랜드로 재편됐다. 현재 MG의 핵심 전략 모델은 MG4 EV다. 합리적인 가격, 준수한 주행거리, 역동적인 디자인을 앞세워 유럽 전기차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과거의 스포츠카 감성을 전동화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전략이다. MG는 ‘가성비 전기차’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브랜드 재건에 성공하고 있다.
이탈리아 피닌파리나는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 하우스로 명성을 쌓았다. 페라리, 알파로메오, 푸조 등 수많은 명차의 외형을 설계하며 ‘움직이는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치시탈리아 202(1947년형)이다. 유려한 곡선과 일체형 차체 디자인은 자동차 디자인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고, 이 모델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랜 세월 디자인 회사로 활동해온 피닌파리나는 창업자의 숙원이던 자체 브랜드 자동차를 전기 하이퍼카 바티스타(Battista)로 실현했다. 1900마력 이상의 전기 파워트레인, 예술품에 가까운 디자인, 150대 한정 생산 전략은 브랜드의 희소성을 극대화한다.
프랑스 알핀은 르노 기반 개조차 제작사에서 출발해 모터스포츠 명문 브랜드로 성장했다. 1960~70년대 활약한 알핀 A110(오리지널 모델)은 랠리와 르망에서 우승을 거두며 브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히 1973년 WRC 초대 챔피언이라는 기록은 알핀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이정표였다. 경량 구조와 민첩한 핸들링은 알핀만의 DNA로 자리 잡았다.
2017년 부활한 신형 알피느 A110은 전통적인 스포츠카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델이다. 알루미늄 차체와 미드십 엔진 구조를 통해 경쾌한 주행 성능을 구현했고, 유럽 시장에서 꾸준한 판매 성과를 내고 있다. 알핀은 여기에 더해 전기 스포츠카 A290과 차세대 전기 A110을 준비하며 전동화 시대의 퍼포먼스 브랜드로 도약을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