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조는 자동차보다 철을 먼저 다루던 브랜드다. 1810년, 프랑스 동부의 한 제분소에서 시작된 푸조는 톱날, 커피 그라인더, 우산 뼈대 등을 만들다 19세기 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다. 그 첫 발걸음은 1889년 증기 삼륜차에서 시작됐다. 이후 푸조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자동차 중 하나인 ‘Type 3’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이름을 올렸다.
푸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건, 기술보다 실용 디자인에 기반을 둔 철학이다. 푸조는 “대중에게 진짜 필요한 차를 만든다”는 입장을 꾸준히 견지해왔다. 브랜드가 추구한 것에는 효율과 디자인, 운전의 즐거움을 모두 아우르는 ‘균형’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i-콕핏(i-Cockpit)’이다. 일반적인 자동차가 운전자를 감싸는 형태의 인테리어 구성을 고집할 때, 푸조는 이를 전복했다. 계기판을 스티어링 휠 위에 배치하고, 스티어링 휠 자체도 작게 설계해 운전자의 시야 확보와 조작 반응성을 동시에 향상시켰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발상이었고 호불호가 갈렸다. 하지만 이 구조는 현재 푸조를 상징하는 디자인 언어로 자리 잡았다.
또한, 푸조는 세계 최초로 후륜 독립현가장치를 양산차에 적용한 브랜드 중 하나다. 1930년대에는 에어로다이내믹한 곡선 차체를 가진 ‘402’ 모델로 디자인 혁신을 주도했다. 당시 시대를 앞서간 차체 곡선은 이후 재규어, 시트로엥 등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1920년대, 푸조는 레이싱 무대에서 강자로 군림하던 시절, 경쟁 브랜드 시트로엥과 ‘기술적 자존심’을 놓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시트로엥이 세계 최초의 전륜구동 대중차를 내놓자, 푸조는 “기술은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는 광고 캠페인으로 맞불을 놓는다. 당시 프랑스 언론은 이를 “두 사자 사이의 철학적 충돌”이라 묘사하기도 했다.
푸조는 월드랠리챔피언십(WRC)과 다카르 랠리에서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브랜드이기도 하다. 205 T16, 206 WRC, 그리고 405 T16 같은 모델들은 오프로드 레이싱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단순히 감성만 있는 브랜드가 아니라, 험로 주행성능과 경량화 기술에서도 정점을 찍은 적이 있다는 사실은 자주 잊힌다. 이 유산은 현재 SUV 라인업(3008, 5008)의 ‘다이내믹한 주행 감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푸조의 또 다른 특징은 늘 ‘적당함’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절대적인 성능이나 스펙 경쟁보다도, 사람에게 잘 맞는 운전감과 탄탄한 승차감, 그리고 미학적 감성 사이의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푸조의 소형차가 유럽 시장에서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하지 않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고유한 감성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푸조는 콘셉트카 하나에도 장인정신을 담는 브랜드다. EX1, 인스팅트(Instinct), 인셉션(Inception) 같은 콘셉트카는 단순한 쇼카가 아니라 브랜드의 디자인 실험실이자 미래 비전 그 자체다. 푸조 디자인의 핵심은 ‘감각적이고 조형적인 조화’. 날렵한 LED 라이트, 사자의 송곳니 같은 주간주행등(DRL), 깊게 파인 보닛 라인 등은 모두 이 디자인 철학의 산물이다. BMW나 벤츠와는 결이 다른, ‘예술에 가까운 자동차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푸조는 PSA 시절부터 유럽 디젤 기술을 선도한 브랜드였다. HDi 디젤 엔진과 SCR(선택적 촉매 환원 장치) 같은 시스템은 탄소 저감을 넘어 질소산화물까지 줄이는 친환경 디젤의 본보기였다. 물론 지금은 전동화 전환기에 있지만, 이때의 기술적 고민과 축적된 데이터는 향후 하이브리드와 전기차 파워트레인에서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최근 들어 푸조는 하이브리드와 전동화 기술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다만, 그 방식은 여전히 푸조답다. 푸조의 하이브리드는 전자 장치의 화려함보다는 운전자가 기계와 소통하듯 반응하는 아날로그 감각에 더 가깝다. 전동화 시대에도 ‘운전의 감성’을 지키겠다는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푸조는 기술보다 아이디어, 성능보다 균형을 추구하는 브랜드다. 최근 올 뉴 3008에서 보듯이, 푸조는 다시금 자신들의 디자인 철학과 주행 감각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전동화 시대에도 푸조는 ‘감성’을 잃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난 200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다름’이야말로 푸조를 푸조답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