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스턴마틴(Aston Martin)은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 중에서도 독보적인 상징성을 지닌 이름이다. 제임스 본드의 영화 속 DB5에서 시작된 헤리티지, V12 자연흡기 엔진의 아이콘적 존재감, 그리고 영국식 수제 스포츠카라는 자존심은 브랜드를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시장은 전동화라는 거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내연기관 중심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도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하이브리드 전략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 여기에 높은 부채 비율, 전동화 속도 지연, 하이엔드 시장 내 경쟁 심화라는 삼중 과제가 브랜드를 압박한다. 이번 인사이트에서는 애스턴마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 전략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브리티시 아이콘’의 무게 ... 유산을 지키는 브랜드
1913년 설립된 애스턴마틴은 한 세기 넘게 “핸드메이드 브리티시 스포츠카”라는 정체성을 고수해왔다. DB 시리즈를 비롯해 뱅퀴시(Vanquish), 발키리(Valkyrie), 발할라(Valhalla) 같은 모델명은 브랜드 역사와 철학을 이어가는 상징이다.
특히 V12 엔진은 애스턴마틴 아이덴티티의 핵심이다. DB11과 DBS 슈퍼레제라 같은 모델은 단순한 출력 경쟁을 넘어, 고급스러운 주행 질감과 배기 사운드를 통해 브랜드만의 감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EU의 탄소 규제 강화와 글로벌 친환경 정책은 V12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애스턴마틴은 한정판 중심 전략을 통해 소량·고수익 모델을 강화하고 있다. 발할라(Valhalla)는 V8 기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하이퍼카로, 시스템 총출력 약 1000마력에 달한다. 포뮬러원 기술에서 파생된 에너지 회수 시스템(ERS)을 탑재해, 전기 모터와 내연기관을 완벽하게 융합한 새로운 퍼포먼스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뱅퀴시(Vanquish) 차세대 모델은 3.2초 제로백, 연간 1000대 이하 한정 생산으로 계획됐다. 기존 V12 자연흡기 대신 고효율 터보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적용하며, 전동화 시대에서도 럭셔리 GT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발키리(Valkyrie) AMR-LMH는 르망 하이퍼카 규정으로 개발된 트랙 전용 하이퍼카다. 모터스포츠 기술을 집약한 모델로, 한정 생산과 초고가 전략을 통해 브랜드 최상단을 상징한다.
이 전략은 ‘브랜드 경험을 상품화’ 하는 접근법이다. 자동차 자체뿐 아니라 트랙 경험, 컬렉터 프로그램, 맞춤형 비스포크 서비스(Q by Aston Martin)를 통해 고객 충성도를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전략은 브랜드 경험을 상품화하는 접근법이다. 트랙 프로그램, 컬렉터 네트워크, 맞춤형 비스포크 서비스 ‘Q by Aston Martin’을 통해 고객 충성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애스턴마틴은 당초 2027년 첫 순수 전기차(EV)를 출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25년 들어 계획을 다시 수정하며 EV 전략을 보류하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중심의 라인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단기 전략은 하이브리드 및 고효율 내연기관 유지다.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본다면 전용 EV 플랫폼 대신 파트너십 기반 전동화 전환이 핵심이 된다. 실제로 브랜드의 하이퍼카 발할라는 800마력급 V8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탑재해, 전기 모터와 내연기관의 장점을 결합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완전한 EV 전환보다는 현실적 전환을 택한 셈이다.
F1과의 연결 ... ‘속도’를 브랜드에 이식하다
애스턴마틴은 2020년대 초부터 포뮬러원(F1)을 브랜드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애스턴마틴 코그니전트 F1팀을 통해 축적한 공력 성능, 경량화 소재, 에너지 회수 시스템(ERS) 같은 기술을 양산 모델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예컨대 발할라 하이브리드 슈퍼카에는 F1 기술에서 파생된 에너지 회수 모듈이 적용됐고, 향후 차세대 V12 뱅퀴시에도 모터스포츠 기반 서스펜션 세팅을 반영할 계획이다. 이는 페라리와 포르쉐가 모터스포츠에서 기술을 끌어오는 전략과 닮아있지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별점이 있다.
애스턴마틴은 2018년 상장 이후 꾸준히 적자를 기록해왔으며, 최근 몇 년간 누적 부채는 약 8억 파운드(약 1조4000억 원)에 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우 트리(Yew Tree) 컨소시엄의 지분 투자와 F1팀 일부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ERP 시스템 도입, 생산 효율화, 공급망 최적화를 통해 연간 운영 비용을 대폭 절감했다. 올해 들어서는 평균 판매 단가(ASP)를 약 19만2000파운드(한화 약 3억3000만 원) 수준까지 끌어올리며 “소량·고수익 모델”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경쟁 구도 ... 페라리·포르쉐 vs 애스턴마틴
전동화 전략에서 애스턴마틴은 경쟁사 대비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리다. 페라리는 올해 첫 전기 하이퍼카를 공개하고, 포르쉐는 이미 타이칸(Taycan)을 통해 EV 시장에서 입지를 구축했다. 반면 애스턴마틴은 하이브리드에 무게를 둔 ‘속도 조절 전략’을 선택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브랜드 헤리티지 보존과 수익성 방어라는 계산된 행보다. 즉, “모든 걸 전동화로 바꾸기보다는, 고객이 원하는 럭셔리 스포츠카의 본질을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다.
이를 위해서는 자체 EV 플랫폼을 개발하기보다는 메르세데스-AMG와 기술 제휴를 강화해, 배터리 및 전기 모터 공급망을 확보한다. AMG GT 하이브리드 및 EQ 시리즈에서 축적된 기술을 공유받아 개발 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소프트웨어 내재화를 늦추는 대신, OTA 업데이트 및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제3자 기술 파트너와의 협업으로 속도를 높이는 중이다. 단기 비용을 줄이면서도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절충안이다.
럭셔리의 영혼을 지키며 생존을 설계하다
애스턴마틴은 “헤리티지를 지킬 것인가, 혁신을 택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하이브리드로 시간을 벌며 전동화 준비를 하는 동시에, 브랜드가 가진 감성 자산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앞으로의 10년, 애스턴마틴의 성패는 “얼마나 자연스럽게 새로운 기술을 흡수해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균형을 지키지 못한다면, 전통의 상징에서 전동화 시대의 ‘잊힌 이름’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훌륭했지만, 살아남을 수 없었던 수많은 전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