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 르노(Renault)가 전기차(EV) 전환 압박 속에서도 내연기관(ICE) 사업을 병행하는 ‘균형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EV와 소프트웨어 투자를 강화하는 한편, 신흥시장에서는 ICE·하이브리드(HEV) 중심으로 수익성을 방어한다. 지역·세그먼트별 최적화 전략을 통해 전환기의 불확실성을 헤쳐 나가는 르노의 핵심 전략을 분석했다.
글로벌 포지션과 사업 구조 재편
르노 그룹은 전통적으로 유럽 의존도가 높았지만, 최근 라틴아메리카·인도 중심의 다변화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2025년 상반기 그룹 매출은 276억 유로(약 4조4900억 원)로 전년 대비 2.5% 증가했으며, 영업이익률은 6.0%를 기록했다. 다만 닛산 관련 회계 처리 변경으로 인해 순손실은 약 111억9000만 유로에 달했다. 르노는 2023년 닛산과의 상호지분 15% 동등화 개편을 마쳤으며, 2025년 들어 인도 합작법인 재편과 브라질 내 지리(Geely)와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전동화 투자, 신흥시장에서는 ICE·HEV 수요 대응을 병행하며 포트폴리오 균형을 강화 중이다.
이중 축 전략: 유럽 EV vs 신흥시장 ICE/HEV
유럽에서는 유로 7 규제와 환경 정책 강화로 EV 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르노는 메간 E-Tech와 차세대 르노 5 E-Tech 등 소형 EV 라인업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확대 중이다.
반면 라틴아메리카, 인도, 북아프리카 등에서는 ICE·HEV 라인업을 유지·확대해 인프라 격차에 대응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5월 지리와 설립한 ‘HORSE 파워트레인’ 합작사가 ICE 및 HEV 파워트레인 공급을 전담하며, 내연 부문 수익성 방어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예약을 시작한 르노 5 E-Tech는 일부 유럽 시장 기준 3만2900유로(약 5340만 원)부터 시작하며, 엔트리 트림은 2만 유로대 후반까지 낮출 계획이다. 생산은 프랑스 북부 EV 클러스터 일렉시티(ElectriCity)에서 진행되며, 현지 생산-원가 절감-탄소 저감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한다. 르노는 “기술 과시”보다 실제 판매되는 EV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제조·원가 체계와 멀티 파워트레인 전략
일렉시티는 르노의 EV 전용 생산 허브로, 클레옹 공장의 전기 구동 모터 라인과 연계해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하고 있다. 부품 수직 계열화, 공정 자동화, 플랫폼 공용화를 통해 킬로와트(kWh)당 원가 절감을 실현하며, 배터리 공급망 역시 엔비전 AESC 기가팩토리와 협업해 현지화 중이다. 한편, HORSE 합작사를 통해 ICE·HEV 부품 외부 공급을 확대하고, 멀티 파워트레인 전략으로 EV 수요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완충한다.
앰페르 IPO 철회와 파트너십 재편
르노는 지난해 1월 EV·소프트웨어 법인 앰페르(Ampere)의 IPO를 철회했다. 외부 자금 조달보다 내부 현금흐름과 얼라이언스 파트너십을 활용해 전동화 투자를 지속하기 위해서다. 닛산·미쓰비시와의 공동 R&D를 확대해 전기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역량 확보에 집중하는 한편, 미쓰비시의 앰페르 지분 투자 철회 이후에는 파트너 다변화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하고 있다.
소프트웨어·서비스 중심 수익 모델
르노는 OTA(Over-the-Air) 기반 구독형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강화하고, ADAS·엔터테인먼트 패키지를 소프트웨어로 판매하는 ‘피쳐스 온 디맨드(Features-on-Demand)’를 확대 중이다. 일렉시티 생산 모델부터 디지털 커넥티비티 플랫폼을 표준화해 총소유비용(TCO) 절감과 데이터 기반 서비스 모델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이는 테슬라·폭스바겐 등과 경쟁하는 소프트웨어 정의 차량(SDV) 전환에서 르노의 차별화 포인트다.
[insight] ‘전환기의 선택’...르노, 내연에서 전기까지 전략은 무엇?
이미지 확대보기IAA 모빌리티 2025 기간 동안 뮌헨 중심부에 마련되는 르노 클리오 전시장 사진=르노
중국발 가격 공세와 시장 방어 전략
올해 상반기 글로벌 EV 시장은 중국계 브랜드의 가격 공세로 크게 요동치고 있다. BYD·지리·샤오미 등은 2만 유로 이하 EV를 무기로 유럽과 남미 시장을 공략 중이다. 르노는 이에 맞서 르노 5 E-Tech와 다치아 스프링(Spring) 등 합리적 가격대 EV를 전면에 내세우고, TCO 경쟁력을 강화하는 전략으로 대응한다. 또한, 배터리 내재화와 현지화를 통해 CATL·BYD 중심의 LFP 배터리 가격 하락에 따른 마진 압박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도 병행한다.
EV 중고차 잔존가치(RV) 안정화
EV 보급 확대와 함께 중고 전기차 잔존가치(RV) 하락 문제가 업계 전반의 리스크로 부상했다. 유럽 기준 BEV의 평균 RV는 약 48%로, 내연기관 대비 7~10% 낮은 수준이다. 르노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배터리 보증 연장(8년/16만km), 배터리 재사용·재활용 체계 강화, 구독형 배터리 서비스를 도입해 RV 안정화를 추진 중이다.
글로벌 경쟁 속 르노의 위치와 과제
올해 상반기 유럽 EV 시장 점유율에서 르노 그룹은 약 11%로, 폭스바겐 그룹(27%)에 이어 2위를 유지 중이다. 그러나 중국발 저가 EV 공세, 테슬라의 가격 인하 전략, 스텔란티스의 소형 EV 공세로 시장 내 입지 약화 가능성이 존재한다. 르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지화 전략, SDV 전환, 합리적 EV 중심 포트폴리오, 얼라이언스 다변화를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르노는 ICE·HEV·EV를 모두 아우르는 멀티 파워트레인 전략과 소프트웨어·서비스 전환을 통해 전환기를 돌파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발 가격 공세, 유럽 규제 강화, EV RV 리스크, 기술 경쟁 심화 등 변수 속에서 성공 여부는 가격 경쟁력, 서비스 차별성, 얼라이언스 시너지, 실행 속도에 달려 있다. 향후 5년, 르노의 ‘균형 전략’은 지속 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반대로 전략적 지체로 평가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