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세계 자동차 시장은 내연기관의 끝과 전기차의 시작 사이에서 요동쳤다. 수많은 브랜드가 “변화”를 외치며 로고를 바꾸고 정체성을 다시 쓰는 사이, BMW는 오히려 낯익은 모습으로 그 격랑을 건너왔다. 여전히 수직형 키드니 그릴은 존재하고, '드라이빙의 즐거움'이라는 철학은 그대로다. 변화의 최전선에서 BMW가 고수하는 단 하나의 전략은 바로 ‘본질’이다.
기술보다 감성, 그 위에 얹는 전동화
BMW의 전동화 전략은 표면적으로는 빠르지 않다. 2024년 기준, BMW의 전기차 판매 비중은 약 15%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이 속도는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BMW 그룹 CEO 올리버 집세(Oliver Zipse)는 “우리는 전기차 전환에 있어서 기술의 가능성뿐 아니라, 고객 경험의 질을 중시한다”고 강조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BMW의 전기차 라인업에서 볼 수 있다. 아이덴티티가 가장 강한 세단 3시리즈와 스포츠카 M 시리즈는 아직 전기차로 전환되지 않았다. 대신 i4, iX, i7 등은 전기차이면서도 BMW 특유의 주행 감각과 물리적 감성, 브랜드 DNA를 오롯이 담아낸다. 다시 말해, 전기차는 BMW에게 있어 단지 ‘구동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브랜드 감성의 확장’인 셈이다.
BMW M 부문은 변화 속에서도 가장 흔들림 없는 포트폴리오를 구축한 브랜드 중 하나다. 전동화 흐름 속에서도 M3, M4는 내연기관 모델로 유지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하이브리드’로 무게 중심을 옮긴 M5가 등장했다. 또, 순수전기 모델인 i4 M50은 BMW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M 모델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M의 영역이 전기차로도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BMW M GmbH의 CEO 프랑크 판 밀(Frank van Meel)은 인터뷰에서 “고성능과 운전의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전기차에서도 그것을 증명할 것”이라며 “감속보다 가속이, 규제보다 감성이 우리 브랜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BMW가 왜 여전히 직렬 6기통을 고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insight] 전통 위에 진화하다 ... BMW, 브랜드 본질을 지켜내는 전략
이미지 확대보기지난 4월 오토 상하이에서 짜릿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BMW 노이어 클라쎄 사진=BMW
리스크는 분산, 속도는 보존 – ‘플랜 B’를 갖춘 전동화 전략
BMW는 내연기관, 하이브리드, 전기차, 수소차까지 모든 파워트레인을 동시에 개발 중이다. i3 단종 이후 잠시 정체된 듯 보였던 전기차 전략은 사실상 ‘숨 고르기’였다. 현재 BMW는 '노이어 클라쎄(Neue Klasse)'라는 완전 신규 플랫폼을 개발 중인데, 이제부터 이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신차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미 지난 4월 ‘오토 상하이 2025’ 등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바 있다.
노이어 클라쎄는 단지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BMW가 정의하는 미래차의 총합이다. 기존보다 30% 이상 효율이 향상된 배터리, 자체 OS인 BMW 오퍼레이팅 시스템 9, OTA(무선 업데이트) 기능, 사용자 인터페이스 변화까지 모두 이 플랫폼에 담길 예정이다.
프리미엄의 기준, 여전히 ‘드라이빙’
자동차 브랜드가 넘쳐나는 시대다. 특히 전기차 시장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로고’의 브랜드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BMW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BMW는 자신들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 정확히 안다. ‘프리미엄’을 ‘화려함’이나 ‘첨단’이 아닌, ‘운전하는 즐거움’에서 찾는 브랜드다.
심지어 BMW는 자사의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마저 ‘드라이빙의 즐거움’ 안에 포함시킨다. 완전 자율주행보다는 드라이버 중심의 반자율 시스템을 우선해 ‘운전의 개입’을 남겨두고, iDrive나 헤드업 디스플레이 등 인터페이스 역시 ‘감성 중심’으로 설계된다. 이 점에서 BMW는 기술을 소비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선택형 진화’를 고수하고 있다.
[insight] 전통 위에 진화하다 ... BMW, 브랜드 본질을 지켜내는 전략
이미지 확대보기올해로 건립 10주년을 맞은 영종도 BMW 드라이빙 센터 전경 사진=BMW코리아
한국, 가장 BMW다운 시장
BMW에게 한국은 그저 ‘판매가 잘 되는 시장’이 아니다. BMW는 한국을 ‘테스트 마켓이자 미래 전략의 바로미터’로 인식한다. 2023년 기준, 한국은 BMW의 글로벌 시장 중 독일, 중국, 미국 다음으로 높은 판매 비중을 보였다. 수입차 판매 1위 자리를 되찾기도 했다. 특히 M 모델의 비율이 20%를 넘는 점, i4와 iX 등 전기차의 초기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점은 BMW 본사에도 인상 깊게 다가갔다.
그래서 BMW는 한국에 특별한 전략을 쏟아붓고 있다. 세계 최초의 ‘BMW 드라이빙 센터’가 인천 영종도에 세워진 것도, 아시아 최초의 M 타운이 서울에 마련된 것도 그 연장선이다. 또한 i7과 X7, 5시리즈 등 플래그십 모델의 글로벌 첫 시승 행사나 언론 공개 행사를 한국에서 진행하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한국 BMW를 이끄는 한상윤 사장은 이를 두고 “BMW 코리아는 단순한 지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브랜드 철학을 고객과 함께 구현하는 공간이자 실험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본질을 고수한다는 것의 의미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은 이제 막 바뀌기 시작했다. 전기차, 자율주행, 커넥티드 기술은 그 자체로 중요한 ‘미래’다. 하지만 그 미래가 감성의 설계를 빼앗는다면, 브랜드는 단지 기술의 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
BMW는 이 함정을 가장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다. 기술을 빠르게, 혁신을 과감하게 추구하면서도 브랜드의 중심을 흔들지 않는 것. 그것이 BMW가 ‘변하지 않으면서도 진화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본질이, 지금 이 순간에도 X3에서, iX에서, 그리고 M3의 배기음 속에서 살아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