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오프로더 시장은 한동안 조용했다. 랭글러와 디펜더, 후발주자로 끼어든 브롱코, 이들 삼각편대는 견고했다. 그런데 올해 한국 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이네오스 그레나디어가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디펜더의 클래식한 DNA를 계승했다는 평가와 함께 등장, 오프로드 마니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처음 그레나디어를 마주하면 기시감이 든다. 네모난 박스형 차체, 둥근 헤드램프, 차 뒤편에 자리 잡은 큼직한 스페어 타이어는 클래식 영락없이 올드 디펜더를 연상시킨다. 이 디자인이 그저 그런 카피를 넘어서는 이유는 브랜드 창업자 짐 래트클리프(Jim Ratcliffe)의 고집이 반영된 결과다. 그리고 그 스토리가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외관은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불필요한 장식이 없다. 오로지 기능성에 집중했다. 지상고와 접근각, 이탈각은 명확히 오프로드를 겨냥했다. 디자인에서부터 오프로드 주행을 위한 본질에 충실한 차량임을 보여준다.
특이함은 실내에서도 이어진다. 운전석에 오르면 항공기 조종석 같은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각종 스위치가 지붕의 오버헤드 콘솔과 대시보드 중앙에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모든 버튼과 다이얼은 장갑을 끼고도 쉽게 조작 가능하도록 큼직하고 직관적이다. 방수 버튼과 세척이 용이한 마감재는 진흙길과 험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난 뒤 간편히 세척할 수 있게 했다.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승차감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다. 이 차는 본질적으로 오프로드를 위한 도구에 가깝다.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인테리어가 전부다. 대신 공간 활용도는 뛰어나다. 차체가 박스 형태라서 실내 공간이 넓고, 적재 공간 또한 우수해 장거리 오프로드 여행에 부족함이 없다.
그레나디어는 BMW가 공급하는 3.0리터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했다. 가솔린과 디젤 두 가지 중 국내에는 가솔린 모델이 우선 들어왔다. 최고출력 286마력, 최대토크 45.9kg·m의 성능을 발휘하며, ZF 8단 자동변속기와 결합돼 매끄러운 구동력을 제공한다.
기술적으로 매력적인 부분은 풀타임 4WD 시스템이다. 주행 중 버튼 하나로 로우레인지 기어를 선택해 더욱 험한 길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인제에 마련된 오프로드 코스에서 달라본 소감이다. 이번 시승은 도심 주행이 많았다. 서스펜션과 섀시의 조합은 절묘하다. 사다리꼴 프레임 위에 견고한 차체가 올라가 있어 비틀림 강성이 뛰어나다. 코너에서 안정감이 좋다는 뜻이다. 물론, 조향은 일반 차량들과 크게 다르다. 전적으로 오프로드만을 위해 세팅된 값이다.
오프로드 특화 차량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도로에서의 승차감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물론 랭글러와 유사한 수준의 진동과 소음은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엔진과 변속기의 조합이 매끄러워 일상 주행에서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고속도로에서도 충분히 안정적이다. 다만 스티어링 회전 감도가 달라 처음이라면 운전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레나디어는 국내에서 1억 원 내외 가격에 판매 중이다. 랜드로버 디펜더나 지프 랭글러 등 경쟁 모델과 큰 차이는 아니다.
그레나디어는 분명 호불호가 갈린다. 편안하고 안락한 SUV를 원하는 소비자에게는 불편하고 투박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오프로더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매력적인 선택지는 찾기 어렵다. 꾸밈없고, 정직하며, 오직 본질에만 충실한 자동차다.
클래식 디펜더의 부활을 기다려온 이들에게는 이 차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제대로된 오프로드를 즐기고 싶은 운전자라면, 이네오스 그레나디어의 매력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