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넘나드는 브랜드 역사 속에는 후발 주자가 선발 브랜드의 기술과 철학을 받아들이며 성장해 온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그리고 토요타와 렉서스가 대표적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바라본 자동차 산업의 계보는 단순한 경쟁을 넘어 한 세대의 유산이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지는 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롤스로이스와 벤틀리: 궁극의 럭셔리를 공유한 형제
럭셔리 자동차의 대명사,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출발선부터 다르지 않았다. 1931년, 벤틀리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롤스로이스가 인수하며 두 브랜드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게 됐다. 이후 수십 년간 두 브랜드는 동일한 섀시와 파워트레인을 공유하면서도 각기 다른 디자인 철학과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롤스로이스가 궁극의 정숙성과 기품을 추구했다면 벤틀리는 퍼포먼스를 강조하는 ‘운전자의 럭셔리’를 내세웠다. 벤틀리는 독립 이후에도 롤스로이스가 남긴 기술 유산을 기반으로 빠르게 회복했고, 지금은 고성능 GT 시장에서 독자적 위상을 갖췄다. 형에서 동생으로 이어진 기술의 전수가 오히려 다른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꽃피우게 만든 셈이다.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초 트랙터를 만들던 기업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페라리의 클러치 결함에 불만을 느껴 엔초 페라리에게 이를 지적했고, 페라리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그가 스포츠카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는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설처럼 전해진다. 첫 모델이 350GT다. 놀라운 수준의 정숙성과 주행감을 보여줬다. 기술적으로는 V12 엔진 설계나 후륜구동 레이아웃 등에서 페라리와 비슷한 방향을 따랐지만 람보르기니는 ‘소리와 존재감’,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이라는 또 다른 영역으로 확장해 갔다. 페라리가 기능미를 추구했다면 람보르기니는 감각적 과잉을 택했다. 페라리의 틈을 읽고,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금까지도 이둘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렉서스는 ‘자기복제의 걸작’이다. 1980년대 후반 토요타는 메르세데스-벤츠와 BMW에 대항할 수 있는 프리미엄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처음부터 독립적 개발팀을 꾸려 프로젝트 ‘F1’을 진행했다. 독일차의 철학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한 끝에 1989년 첫 선을 보인 LS 400은 정숙성과 품질, 신뢰성을 앞세워 미국 시장을 단숨에 장악했다. 기술적으로 렉서스는 토요타의 전자 기술과 생산 노하우를 고스란히 가져왔다. 그러나 품질 기준과 소비자 대응 방식은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청출어람의 자세로 독립해 높은 고객 만족도를 기록한 대표 사례다.
포르쉐 911은 수많은 브랜드에 영감을 준 모델이다. 알파 로메오, 닛산, BMW, 현대차까지… 후발 주자들이 자사의 스포츠카를 개발할 때면 반드시 벤치마킹 대상에 오르는 모델이 바로 911이다. 911은 후방 엔진 구조라는 비효율적 레이아웃을 극복하며, 드라이빙 밸런스와 엔지니어링의 상징이 됐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고성능 N 브랜드를 기획할 당시, 현대차는 포르쉐 출신 인재를 영입해 ‘감성 퍼포먼스’ 구현에 나섰다고 한다. 911의 DNA는 구조적으로는 따라 할 수 없어도, 운전의 감성적 몰입이라는 측면에서 ‘간접적인 표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도 탄생 초기부터 BMW 5시리즈를 넘어서겠다는 목표 아래 개발이 시작됐다. 제네시스는 2015년 독립 브랜드로 출범한 이후, G70, G80, G90까지 풀라인업을 갖추며 프리미엄 세단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워왔다. 흥미로운 점은 제네시스 개발 과정에서 수많은 독일차들이 비교 대상이 됐다. 실제 개발 책임자들은 공공연히 “BMW를 벤치마킹했다”고 인정다는 후문이다. 섀시 밸런스와 핸들링 감각은 BMW의 주행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동급 최고 수준의 승차감과 주행성능’을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는 제네시스 G90이 국내에서 벤츠 S클래스를 뛰어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새로운 지평을 짜고 있다.
이 외에도 GM과 대우자동차, 볼보와 폴스타, 마쓰다와 포드 사이에도 스승과 제자 또는 기술 계승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앞으로 자동차 시장은 EV, 자율주행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데, 경쟁과 견제, 이로 인한 산업 발전의 기회는 지속할 전망이다.